게르니카(Gernika)는 스페인 동부 바스크지방의 한적한 도시로 알려졌다. 과거 비스키야 왕조의 수도로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바스크족에게는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여유로웠던 게르니카도 역사의 소용돌이는 피할 수 없어 스페인내전에 휘말렸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등 참여지식인들의 참여로 유명한 스페인 내전의 불행은 외세의 유입이었다.
내전 종료후 철권통치를 휘두른 독재자 프랑코는 히틀러를 끌어들였고 1937년 4월26일 나치 공군은 평화스러웠던 게르니카를 폭격해 무고한 양민 300여명이 사망하고 1천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무고한 양심의 처참한 학살에 세계는 분노했고, 지식인들은 울분을 토하며 자신이 가진 무기로 참상을 전파했다.
그 가운데 ‘파블로 피카소’가 있었다.
그는 총 대신 붓을 들었다. 그리고 광기(狂氣)어린 전쟁의 공포와 인간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처절한 배신감을 화폭에 담아냈다. 20세기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이렇게 탄생했다.
다소 난해한 입체파 그림이라 낯설어하는 미술의 문외한이나 피카소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그림이 주는 경외감과 스토리에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편견을 버리고 다시금 그림을 보노라면 대가(大家)의 정신이 녹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스페인 마드리드 레니아 소피아 미술관 2층에 자리 잡은 게르니카는 예술적 최고경지를 찾는 이들 못지않게 역사의 현장을 되새기려는 이들로 순례지로 자리잡았다.
1919년 이 땅에서는 3월1일 독립만세사건이 있었다. 억눌린 식민생활을 청산하고 자주국가를 원하던 민족공동체의 외침이었고 침략자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었다.
3월31일 지금의 화성군 제암리 발안장터에서도 만세사건이 터졌고 일제는 군대를 보내 진압에 나섰다. 진입한 일본군은 4월15일 강연이 있다며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20여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출입문을 봉쇄한 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뛰쳐나오는 사람은 칼에 찔렸고 도망하는 사람은 총에 맞았다. 인근 민가는 일본군에 의해 불살라졌다.
인류는 역사를 통해 ‘있어서는 안될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화성시도 제암리에 유적지를 만들고 기념식을 갖는 등 의미를 되새기고 있으나 후세에 물려줄 문화유산이 없다는 점은 유감이다. 이제라도 ‘제암리’를 주제로 한 미술공모전이나 예술제를 통해 ‘게르니카’ 못지않은 역작을 기대하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 본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