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총선을 앞둔 여야의 뜨거운 열기가 국민들 시선을 붙잡고 있을 때 갑작스레 미국과 북한이 합의안을 내놓았다. 미국과 북한이 협상테이블에 앉는다는 소식이 들려도 워낙 지지부진한 흐름이라 주목치 않았던 언론들도 화들짝 놀라는 표정들이다.
국내 여론이 ‘누더기 선거구’ 획정이라는 정치인들의 몰상식에 들끓던 지난달 29일, 미국과 북한이 비핵화 사전조치와 대북(對北) 영양지원에 전격 합의했다. 특히 양측이 1년 이상 논제로 삼았으나 별진전이 없던 우리늄농축프로그램(UEP) 가동중지와 북한 김정은체제 안정을 위한 영양지원의 구체적 내용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북한이 서방세계를 움직이는 지렛대인 핵관련 구체적 합의는 곧바로 6자회담 재개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양측의 틈새에 한국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소위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미국과 교류하고 남한을 고립시킨다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이 고정화된다는 느낌이다.
북한은 미국과 협상이 무르익고 있는 시점에도 우리측을 향해서는 전쟁불사를 천명하며 강경발언을 일삼아 왔다. 이는 미국과의 협상과는 별개로 남한과의 갈등은 피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음이 분명하다.
이웃 강대국의 움직임도 우리측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아 불안감을 더한다.
알려진대로 중국은 혁명동지적 분위기로 북한을 끔찍이 챙긴다. 중국은 최근 탈북자문제에서 보여주듯 북한과 남한의 이해가 엇갈리는 장면에서는 북한의 손을 들어주고 있으며 차기 지도자라는 시진핑 국가부주석을 비롯한 지도부의 입장도 다르지않다. 그동안 중국에 비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됐던 러시아도 북한을 향한 추파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 역시 한일간 껄끄러운 역사문제 등에서 부채의식을 벗고 우익의 노골적 목소리가 자리 잡고 있어 공조체제가 예전만 못하다는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물론 미국은 ‘북미간 관계 진전을 위해서는 남북 관계 개선이 필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 외교부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통미봉남(通美封南)’을 외교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 혹은 일부의 과장된 표현이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중차대한 우리 문제에서 우리만 배제당하는 소위 ‘왕따’가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구한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한제국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외적을 이용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에 함몰됐다가 비운을 맛봤다.
무조건 자강(自强)만이 길이라고 외치기에는 실타래처럼 얽힌 국제정세가 녹녹치 않지만 외교의 힘도 결국은 국부(國富)에서 나온다는 점은 역사의 진리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