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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선경 열사를 기억하자

3월은 일제 강점 하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만세 시위가 일어난 달이다. 도내에서도 수원, 화성, 안성 등지에서 들판의 불길처럼 뜨겁게 번져 올랐다. 이로 인해 제암리와 수촌리 등이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으며 순국했다. 수원의 이선경 열사도 이때 체포돼 투옥됐고 고문을 당해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와 같은 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관순 열사는 알아도 이선경 열사는 모른다. 지역에서 조차 그를 몰랐다. 독립유공자 포상도 받지 못했다.

이선경 열사는 1902년 당시 수원면 산루리 406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서 태어나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4월 30일 서울의 사립 숙명여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5일 서울 학생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돼 3월 20일 방면된 바 있다. 이선경은 임순남·최문순·박선태·이득수 등과 함께 비밀 결사조직인 혈복단(血復團-후에 구국민단으로 개칭) 멤버로 활약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혈복단의 목표는 ‘한일합방에 반대해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해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돼 있는 사람의 유족을 구조한다’는 것이었다.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에 따르면 혈복단은 1주일에 한번씩 금요일마다 수원 읍내에 있는 삼일학교(현 매향여고)에서 회합해 독립신문의 배포 등을 논의했다고 한다. 이선경 열사는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돼 후일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 힘을 다하고자 준비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활발하게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체포됐던 것이다. 그리고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1921년 4월 21일 오전 8시 수원면 매산리 219번지에서 사망했다. 19살의 나이였다.

유관순 열사가 1920년 10월 순국하고 난 지 6개월만인 1921년 4월 21일 이선경 열사가 꽃다운 나이에 또 다시 순국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유관순 열사의 이름만 기억해왔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2011년부터 ‘수원학 연구 및 사료발굴사업’을 진행해 온 수원박물관의 노력으로 올해 삼일절에 이선경 열사에게 애국장이 추서돼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았다. 자칫 역사의 그늘에 가려 아예 잊혀질 뻔 했던 이선경 열사의 애국혼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한 수원박물관 관계자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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