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낙타, 뿔은 사슴, 눈은 귀신, 몸통은 뱀, 머리털은 사자, 비늘은 물고기, 발은 매, 귀는 소의 형상이다. 고대인들이 상상한 용(龍)의 모습이 이렇다. 동양의 신비한 사상까지 융합된 용은 등에는 81장의 비늘이 달렸으며, 목 밑에는 한 장의 커다란 비늘을 기점으로 반대방향으로 난 49장이 자리 잡고 있다. 반대방향으로 난 비늘을 바로 역린(逆鱗)이라고 하는데 천하무적인 용의 급소다. 잠자던 용도 역린을 건드리면 통증에 미쳐 날뛰게 되며 반드시 역린을 건드린 자를 물어 죽인다고 알려졌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불리는 한비자(韓非子)가 세난(稅難)편에서 역린지화(逆鱗之禍)를 소개하면서 ‘역린’이라는 말이 유명세를 탔다. 한비자에 따르면 용은 온순하고 친밀하다가도 용의 목 밑에 거꾸로 나있는 비늘 즉, 역린을 건드리면 광폭하게 변하면서 필히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이는 제왕(帝王)의 시대, 왕의 치명적 약점을 건드리면 화를 입는다는 뜻으로 회자됐으며, 특히 왕의 잘못을 논하던 간관(諫官)들에게는 지침이었다.
요즘 여의도에는 난데없이 역린지화(逆鱗之禍)가 다시 화제라고 한다. 현재 사실상 공천권을 틀어쥐고 정국을 재단하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의 역린을 건드린 정치인들이 숙청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의 측근에서 저격수로 변신한 여성 국회의원이나 막말을 했던 의원들이 모두 낙천됐다는 배경을 깔고 있다. 나아가 박 위원장의 대선가도에서 역린을 건드릴 가능성이 있는 인물까지 사전에 제거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민주당 역시 한 대표의 정치적 뿌리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정치인이나 친노(親盧) 세력의 대척점에 서있는 정치인들은 대부분 고배를 마셨다는 뒷담화다.
정치에 함몰된 우리 사회의 담론에도 이런 역린이 존재한다. FTA에 찬성하면 무조건 새누리당 지지자로 몰린다. 반면 무상급식에 찬성하면 이 역시 야당 지지자로 낙인찍힌다. FTA에 찬성하면서 무상급식의 필요성에 고개를 끄덕이는 국민들이 존재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마치 이러한 의견표출은 곧바로 보수나 진보의 역린을 건드린 것으로 간주돼 정치·사회적으로 매장되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니 상식을 기반으로 한 보통사람들이 설 중간자의 위치가 사라지고 있다. 이는 아무리 현대적 기법을 동원해 정교한 여론조사를 해도 투표결과가 상이하게 나타나는 것과 무관치 않다. 중요한 것은 역린을 건드려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풍토다. 민주주의를 강목으로 하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역린은 없어져야 여론이 건강성하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