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일자 조선일보 1면 톱기사에 서울지역 태권도장 100명의 초등학생 64%가 애국가 1절도 쓰지 못했고, 4절까지 쓴 학생은 1명도 없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1학년 때 배웠으나 1년에 몇 번 불러본 경험이 없다. 가사 의미의 가르침도 빈약하다. 국경일 사전, 사후 교육도 사라져 가고 국민의례도 약식으로 하기에 애국가 4절까지 부를 기회도 없었다. 태극기 달기 교육도 희미해져 왜 애국가를 불러야 하고, 태극기를 달아야 하는지 답하지도 못한다. 태극기 달라고 방송하지만 게양율은 5%도 안 된다. 모두가 방송만 듣고 만다. 학교의 기념행사도 잘 듣지도 않는 방송 훈화로 마친다. 국경일을 쉬는 날로만 생각한다.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하겠지 모르지만 옛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필자가 1968년 시골벽지로 초임 발령 받은 20대 초반이였다. 국경일 마다 와이셔츠상자로 국기 함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국기달기운동을 전개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휘날렸다. 매일 학급조회와 매주 월요일엔 애국가 4절 제창으로 애국조회를 시작했다. 교장선생님 훈화도 철저했다. 70~80년대에는 전국 집집마다 태극기가 휘날리던 시대였다. 지금은 애국조회란 말도 사라지고 운동장 조회도 시끄럽다는 민원으로 실내 방송조회로 한다. 국경일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쓰기 교육은 옛이야기 같다. 90년대에 들어서서 이것들이 마치 군사정권의 유물로 취급되다시피해 현장에서도 모두가 소극적이었다.
필자는 2002년도 본청 장학관 때 윤옥기 교육감의 기본이 바로선 경기 학생상 정립을 위한 코시 정책을 추진했다. 그 때 국경일마다 애국심 교육과 국기달기운동을 전개한 후 장학사를 동원해 수원, 안양, 부천 등 7개 시 지역 대상으로 국기 게양율을 현장 조사해 순위를 공개하고 표창했다. 우수지역에는 90% 넘는 태극기 게양율을 보였다. 도내 학생들도 아파트 층을 오르내리며 국기달기 운동을 전개하고 봉사 활동 점수를 받았다. 노인회와 부녀회도 동참했다.
그러나 교육감이 떠나신 2005년 이후에는 국기달기 운동이 시들해지더니 게양율 통계조차도 사라졌다. 그러나 필자는 이어서 2007년 8월까지 광주하남 교육장을 하면서 태극기달기 운동을 전개해 이 지역에 85% 이상 국기 게양율을 올렸다. 광주초와 하남초 주변을 문화의 거리로 지정해 연중 태극기를 게양했다. 2007년 9월 퇴직한 수원 신성초에 와서도 영통 1동 초·중·고 8개교와 동사무소와 합동으로 추진해 80% 이상의 국기 게양율로 수원시장 표창도 받았다.
그러나 이 노력은 일부 지역 뿐이였다. 기관장이 바뀌면서 점차로 희미해져 지금은 그 지역이나 다른 지역이 별 차이 없이 5% 미만인 듯 하다. 그러기에 교육부 장관이 적극 추진하면 전 국민이 달라지고 교육감이 추진하면 전도민이 달라지며 학교장이 추진하면 그 학구내만 달라진다. 그렇다면 누가 앞장서 추진해야 하는가? 공문 한 장으로 학교와 학생의 변화를 기대함은 허상이다.
그런데 3월 3일자 조선일보에 ‘애국가 4절까지 부르는 경북 청송군청’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군수는 그동안 직원의 불만을 무릅쓰고 매월 월례 조회시에 애국가 4절을 우렁차게 앞장서 불러 250여명의 전 직원이 4절까지 부르게 됐다고 한다. 교육장도 학교장 아닌 청송 군수의 이 모습을 우리 교육계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본다.
이제부터라도 아파트 민원으로 못 한다고 말하지 말자. 고발당해 판사가 하지 말라고 판결날 때까지 애국조회를 실천해 보자. 우리 주변엔 중국과 36년 우리 주권을 침탈한 일본이 있고, 휴전선 넘어 6.25의 주범인 북한 정권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나면 도망가거나 이민가고 싶다는 젊은이들이 많다면 이 나라는 누가 지킬 것인가? 미국의 축구 경기장에서 양편의 패싸움이 벌어진 극한 상황에서 미국 국가를 틀어줬더니 모두가 싸우다 말고 기립해 국기경례를 하더라는 이야기와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국내 전쟁이 터지자 수업하다 말고 싸우러 고국행 비행기에 몰려들었다는 애국심을 우리는 가르쳐야 할 시기임을 이 두 기사가 가르쳐 주고 있다.
/전근배 前 광주하남교육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