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영화를 보노라면 목숨을 건 증언의 댓가로 자신의 과거 신분을 지우고 ‘제3의 장소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소위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통해 ‘잊혀질 권리’를 얻은 것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러한 ‘잊혀질 권리’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다른 점은 범죄자가 아닌 인터넷이 대상으로 한번 각인되면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인터넷에서 잊혀지고 싶은 소망이 반영된 것이다. 노출되고 싶지 않은 사생활이 한 번 인터넷을 타면 기하급수적인 퍼나르기를 통해 어느 곳에 그 정보가 있는지 확인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확산된다. 이는 인권침해이자 인격살인의 경우도 있지만 상대가 완벽성을 자랑하는 현대인의 필수품인 인터넷이이서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 따라서 인터넷이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할수록 익명으로 살고픈 인류의 소망도 커져가고 있다.
이러한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논란에 불을 당긴 것은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가 쓴 동명의 저서인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이다. 쇤베르거는 책에서 인터넷의 가장 큰 장점인 완벽한 기억이 초래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보이스 피싱, 유명 연예인 사적자료 유출, 개인 신상털기 등 모든 부작용이 인터넷의 완벽성과 전파성에 기인하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미 저자는 2007년부터 이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망각의 미덕인 인생사를 보호하고자 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지난 1월 인터넷 사업자에 대해 법적근거 없이 보관된 개인 정보에 대한 사용자의 삭제청구권을 골자로 하는 정보보호법을 개정한 바 있다. 주요 목표물은 세계적 검색사이트인 구글이지만 사실상 인터넷에 대한 규제여서 각국이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잊혀질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법률제정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그리 녹록치 않다. ‘잊혀질 권리’의 제도화를 준비 중인 국내 전문가들은 범죄자들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경우 우리 사회에 축적돼야 할 역사(歷史)가 사라질 것으로 우려한다. 만약 친일파 후손들이 ‘잊혀질 권리’를 근거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내용을 삭제하라는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는 만큼 입법과정에서 세밀한 검토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울타리가 없이 순식간 퍼지는 인터넷의 특성상 지울 방법이 없다는 기술적 한계도 걱정거리다. 현생인류의 최대걸작이라는 인터넷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