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세기에는 신(神)의 죽음을, 20세기에는 인간의 죽음을 선포한 현대 문명은 이제 그 종착점을 향해 가속적으로 달리고 있으며, 21세기 과학의 발달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전체 인간 문명이 투영시키는 영상의 역기능 또한 만만찮게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 만물의 영장이란 숭고한 정의를 부여받은 인간의 삶은 그 정의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끔 만들었고 인간 특유의 사고 능력은 그 고유의 속성으로 인해 인간을 더 비참하게 질책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당연히 인간에게 주어져 영위해야 할 진실된 삶, 인간다운 삶보다는 알맹이 없는 맹목적, 피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의 본질과 더불어 존재의 가치조차 가벼이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뒤틀린 현실 속에 참된 의미에서의 인간성 회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삶에 있어 내용이 결여된 형식만의 추구, 본질보다는 기교에 대한 선호 현상은 이미 팽배해졌다.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소중함을 추구하기보다 외적인 테크닉에 우리의 가치와 귀중한 시간을 더 투자함에 따라 당장은 좋아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성을 상실한 삭막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토막 살인을 비롯해 청소년들의 자살과 관련된 뉴스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경악스런 사실이자 인간의 존재가 그렇게 처참하게 부숴질 수 있는가 싶은 자괴감으로 혼돈스럽다. 어떻게 인간이 같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고 그 육체를 해부하듯 훼손할 수 있단 말인가?
아프리카의 성자라 불리 우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생명 경외’에서 “나는 살려고 애쓰는 생명체들의 와중에 있는 살려고 애쓰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윤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모든 살려고 하는 의지에서 자신에게 부여했던 생명의 경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 또한 살려고 애쓴다는 것을 자기 안에서 경험한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을 증진하며, 생명을 고양시키는 것을 선으로, 반대로 생명을 파괴하고 생명을 억압하는 것을 악으로 본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의 절대적이고 기본적인 원리이다.” 슈바이처는 남들이 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인생을 철두철미하게 살았다. 그는 모기도 죽이기를 꺼려해 단지 모기를 방밖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하물며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해하고 살육하며 생명을 앗아 갈 수 있는지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우리는 좀 더 인간의 가치와 생명 앞에서 순수해져야 할 것이다. 생명은 결코 수단과 도구로 남용될 수 없는 존엄한 것임을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생명을 가꾸지 못하고 생명외경의 맘을 지켜가지 못하는 이 시대 우리의 무지함과 악함에 반성해야 한다.
한 철학자는 우리 인간 육체의 가치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누 7장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지방과 중간크기 못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철, 찻잔 7잔을 채울만한 당분과 닭장 하나를 칠할 수 있는 석회와 성냥 2천200개를 만들 만 한 인과 약간의 소금을 만들 수 있는 마그네슘, 장난감 크레인 하나를 폭파 할 수 있는 칼륨 그리고 개 한 마리에 숨어있는 벼룩을 몽땅 잡을 수 있는 유황 이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의 가치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으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까? 바로 정신적 가치이자 생명의 소중함이다. 그 사람이 어떤 가치기준을 갖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가 결정된다. 따라서 인간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사람의 그 가치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는 시인의 마음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속에 부단히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준의 용인대 경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