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숙 시집 ‘바람의 서(書)’/2008년/천년의 시작
왁자지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느 테이블의 대화에도 끼지 못하고 많은 얼굴을 보았으나 실은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서둘러 바쁜 척 돌아오고 마는 때가 있다. 그런가하면 절해고도에 혼자 앉아서도 수많은 시간들과 만나고, 헤어졌던 수많은 사람들과 조우하게 되는 생생한 시간들이 있다. 모든 애인들을 호명하며 추억들을 꺼내어 반죽해보는 고요하지만 와글거리는 시간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앞의 시간도 뒤의 시간도 고독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지금은 뒤의 시간이 더 그립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 게 아니라 새들은 페루에 가서 모래무덤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울다가 다시 태어난다./박홍점 시인
이곳은 페루
자줏빛 달이 뜨는 섬
깨진 알을 낳은 새들이 자꾸 헛발길질을 하고
바람은 파도를 거슬러 솟구쳐올라요
페루로 가는 길은 알 수 없지만 나는 페루에 있어요
해안선을 따라 죽은 물고기들이
시간을 말리고
나는 갈증 없는 기억들을 건조시켜요
향기 없는 바람이 목울대를 간질이고
머나먼 대륙의 모래는 안부 잃은 당신 소식 전해 주어요
꽃이 피지 않는 섬
이곳에서 나는 몇 계절을 충분히 견디고
당신은 기어코 십년 전의 그 향기로 내 품에 안겨오므로
바람결에 당신의 체온이 묻어나므로
당신의 소식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어요
중략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공명음
새들의 울음소리
시간에 저항하는 성난 바람소리
고요 속의 함성
함성 속의 침묵
당신은 페루를 모르지만
페루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르므로
당신을 찾지 않기로 했어요
중략
살아도 살아지지 않는 날들
그러므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호명하지 않기로 했어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맹가리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