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사랑채 들어서자 발꿈치가 들린다. 사뿐사뿐 걸어가 앉아야 할 것 같은 문갑 앞, 온돌방엔 정갈한 콩기름이 금방이라도 묻어날 듯 윤이 나고 한지 자락 한 땀 한 땀 겹쳐진 문살, 솔바람 머금은 벽지에선 새아씨 가녀린 숨결이 바지런히 들락인다.
이 집의 주인이었다는 만석지기 부자는 어떻게 살았을까? 농사가 최고의 경제 수단이었던 조선시대의 만석지기는 분명 시대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분명했기에 아흔 아홉 칸의 집을 짓고 살지 않았을까. 우리 가족은 그 고택의 안 사랑채를 하루만 빌리기로 한 것이다. 도시문명과 디지털에 지친 심신을 달래보겠다는 생각에 출발한 여행이 고택에 들어서자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아흔 아홉 칸의 공간, 그 시간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문지방에 가지런한 하얀 고무신. 사극 속의 주인공이 된 듯, 전쟁의 그곳으로 돌아간 듯 편안한 마음으로 스며든 사랑채. 갓 시집온 새 색시(며느리)가 사용하는 사랑채엔 따로 작은 정원이 딸려있고 그 정원의 가운데엔 그간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감나무 한 그루가 추억을 곱씹으며 늙어가고 있었다. 새 색시가 누렸을 그 소담한 정원을 마주하는 툇마루에 앉아 국화차를 우려마시는 여유. 전철과 도로, 도심을 달리며 뛰어야했던 그 시간들을 잠시 잊고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게 해 준다.
목소리조차 조용히 주고받아야하지 않을까, 감나무 그늘을 지나 뒤꼍으로 돌았을 때 햇살 쏟아지는 그곳에 줄 지어 앉은 옹기의 숨결은 아직도 한복 치맛자락을 끌며 들어올 새댁을 기다리고 있는 듯, 소박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항아리마다 사연을 담은 채 그 사연 숙성시키느라 들숨 날숨 휘적휘적 드나드는 소리인가, 윙윙 벌들이 날갯짓을 한다.
뒤꼍을 나와 바깥사랑채로 건너갈 쯤 만난 주인은 조상이 물려준 귀한 고택이라 고이 모셔뒀는데 사람의 입김이 멀어지니 집조차 그 정이 그리워 허물어져 가더라며 세월이 안내 해주는 대로 고택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끌벅적하게 추수해 비지땀 흘리며 볏섬 지고 드나들었을 일꾼들의 왁자한 소리 금방이라도 들릴 듯한데 150년도 채 안 된 지금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한 달 살이 인생인 내가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니 아흔 아홉 칸 고택의 안 사랑채를 차지할 수 있다니. 이 생경한 현실을 인정한다는 듯 조근조근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별이 쏟아져 내리고 앞뜰 지나 벼논에 와글거리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양반들의 팔자걸음이 아닌 갖가지 승용차들의 웅웅거리는 거친 숨소리, 볏짚 나르는 일꾼들의 질팍한 목소리가 아니라 하루 묵어갈 여행객들이 두런두런 풀어놓는 시름과 수다로 익어가는 고택.
“손님! 손님!” 고택을 관리하고 있다는 송씨 가문 11세손이 부르신다. 손님에 대한 서비스라며 정갈하게 붙여온 김치전이 참으로 맛깔스럽다. 고택에서 만난 시간의 얼굴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21세기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또 다른 싱그러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에세이 문예 등단 ▲평택문협 회원 ▲한국에세이작가연대 회원 ▲독서토론논술 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