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해가 중천인데 여직 뭐하는 거야. 밭에 나와 뭐 좀 건져보라고.” “걱정 말아요. 그렇잖아도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야~요.”
이슬이 흠씬 내린 초여름 아침이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며 입맛이 떨어지는 시기다. 아침 식탁을 무엇으로 차리나, 걱정을 하던 차였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텃밭에 푸른 야채며 열매채소들이 풍성해서 마음까지 싱그러워진다. 상추 잎과 쑥갓을 솎고, 아욱을 한 줌 뜯는데 남편이 소리친다.
“어이. 완두콩이 영글었는데, 이리 와 봐.” “영글긴 뭐가 영글어요. 엊그제 보니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던데.” 감자 두렁을 지나 강낭콩과 함께 심은 완두콩두둑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것 봐, 이렇게 잘 영글도록 뭐 했어?” “어머, 웬일이야. 벌써 통통해졌네.”
남편의 핀잔 아닌 핀잔을 들으며 완두콩을 들여다보니 통통하게 잘 영글어있다. 아마도 갑자기 기온이 올라간 탓인가 보다. 꼬투리가 탱탱하게 부풀어 덩굴 사이에서 주렁주렁 매달려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꼬투리 표면이 오돌토돌해 영근 강도를 알 수 있다.
“곧 장마가 진다는데 썩을 뻔했네요.” “오늘 아침 식사는 완두콩밥으로 하고 비 오기 전에 따기로 합시다.” 남편과 아침식사에 쓸 콩을 따기 시작했다. 만져지는 꼬투리 하나하나가 투실투실하게 탐스럽다. 손에 푸짐한 느낌을 느끼며 이 녀석들이 이렇게 자라서 알이 꼭꼭 차준 것이 대견하다. 소쿠리를 들고 마당으로 나와서 꼬투리를 까는데... 좀스럽다고 거들지 않던 남편도 함께 마주 하며 콩을 까기 시작한다.
“야, 고것들 잘 영글었는데?” “그래, 정말 통통하고 윤이 반짝반짝하지?” “오늘 반찬 없어도 밥 한 그릇 너끈히 해 치우겠다.” 남편은 벌써 입맛을 다시고 있다. 나는 완두콩 한 꼬투리를 까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꼬투리 안에는 다섯 톨, 여섯 톨, 일곱 톨 정도의 완두콩들이 가지런히 앉아 햇빛을 눈부셔 한다. 그 푸른빛이 너무 고와 콩을 깔 적마다 풋내와 함께 내 마음도 눈이 부시다.
완두콩은 올해 처음 농사지은 작물이다. 탐스러운 초록빛 콩알을 보며 농사꾼도 이러한데 주말농장하는 도시 사람들은 ‘얼마나 신기해 할까’하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완두콩 한 줌을 두고 아침밥을 했다. 하얀 밥 위에 파릇한 콩이 입안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낸다. 남편은 그 덕분에 입맛이 돌아왔는지 밥 한 공기를 거뜬히 해치우고 휑하니 밖으로 나간다. 부드럽고 달콤한 콩밥을 먹고 나니 문득 얼마 전에 시집간 딸이 이번 주말에 온다던 생각도 나고 시동생과 친정동생들, 그리고 가까이 지내는 이웃들까지도 생각이 난다. 밭에서 곡식이나 풋것들이 날 때면 완두콩 꼬투리처럼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던 이웃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주말에 비가 오면 콩이 짓무를까봐 주섬주섬 콩꼬투리를 땄다. 그리고 콩꼬투리처럼 살았던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 봉지 봉지마다 싸야겠다고 생각을 하니, 이웃들 모두가 맘에 걸린다. ‘콩 한 톨이라도 나누는 이웃이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은 언제나 남는다.
▲ 한국문인협회 시흥시지부장
▲시집 <산풀향 내리면 이슬이 되고>
<연밭에 이는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