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로 들판이 시끌시끌하다. 발아를 늦췄던 씨앗들 서둘러 잎을 꺼내고 더디기만 하던 성장이 하루가 다르게 웃자란다.
망초꽃 하얗게 일렁이는 묵정밭 앞에 걸음을 멈춘다. 묵정의 세월이란 것이 다 그렇듯 손길이 가지 않는 밭은 잡초와 날것들의 천국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과 봄에 꽃을 피우고 지금은 홀씨를 날리고 있는 민들레며 풀씨가 이 밭의 주인이다. 가끔씩 튀어 올라 날것들을 놀라게 하는 꿩과 비둘기가 한낮의 고요를 흔들곤 한다. 들꿩이 날아오른 자리 파르르 꽃잎을 떨고 있는 패랭이꽃에 눈길이 머문다. 조용하고 수줍은 듯 화려하지 않고 은근한 패랭이꽃, 나는 패랭이꽃을 좋아한다.
삶의 고뇌와 방황이 많던 스무 살 무렵 저수지 둑에 앉아 고요한 수면에 잡히는 물 주름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 뭔가,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십 대의 고민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날도 한동안 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꽃 한 송이를 보았다.
칡덩굴과 잡풀이 우거진 풀 속에서 보랏빛으로 피어있는 한 송이 꽃, 패랭이 꽃이었다. 그 꽃이 하도 예뻐서 꺾으려 했지만 쉽사리 제 몸을 내주지 않았다.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의연히 피어있는 패랭이꽃, 온실 속의 화초는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꽃잎이 떨어지고 꽃대가 꺾이겠지만 하늘과 땅의 경쟁 속에서 꽃을 피운 들꽃은 스스로 견디는 법을 터득하며 나름대로 종족 번식을 한다.
‘저 덤불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허공을 환하게 밝히는 꽃도 있는데 너는 얼마나 빈약한 존재이냐, 저 꽃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하는 질책이 가슴 한쪽에서 일어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꽃을 보면서 희망이 생겼다. 온실 속 화초도 아닌 내가 그 온실 속을 기웃거려봐야 뭐가 달라지겠는가. 야생은 야생에 맞는 환경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패랭이꽃에 애착이 가고 사랑스러웠다. 초라한 듯 단아하며 여린 듯 단단한 줄기,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당당히 꽃을 피우는 그 꽃의 꽃말이 ‘언제나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바위에서 피는 대나무를 닮은 꽃이라 하여 석죽이라고도 한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패랭이꽃을 보면 기쁘고 느슨해지던 마음이 단단해진다.
지금은 서양에서 들어온 품종과 개량종이 많다. 꽃잎이 풍성하고 색깔도 다양하여 축하의 꽃으로 쓰이기도 하고 화단이나 거리, 생활 가까운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지만 가끔씩 눈에 띄는 토종의 패랭이꽃을 보면 방황하던 시절의 내가 떠올라 웃음을 띠게 된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 무렵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만고만한 고민을 나 혼자만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크게 생각하고 가슴 졸이던 때가 있었다. 꽃이 꽃으로 호명되기 위해 견뎌야 할 시간을 기억하기보다는 그 화려함만 보았기 때문에 그만큼의 고뇌도 컸던 시절에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워준 꽃이기도 하다.
지천명의 세월이 되어서 묵정밭을 바라본다. 살아가면서 때론 묵정의 세월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는가.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잃어버린 시간과 수없이 했던 가슴앓이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무거운 수레일수록 조용하다는 것을 묵정의 세월 속에서 확인하는 시간이다. 꿩이 날아오른 자리 잠시 흔들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패랭이꽃을 휴대폰 안의 카메라에 담으며 밭을 빠져나온다.
▲ 한국문인협회 회원 ▲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 안견문학상 대상(시) ▲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