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군(軍)생활을 했던 80년대 전방부대는 군기가 엄했고, 반입물품 역시 철저히 관리됐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을 운좋게 손에 쥘 수 있었다. 군복 뒷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몸집의 시집이었지만 27개월의 군생활 동안 살아있음과 인간다움을 잊지 않게 해준 고마운 선물이었다.
특히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로 시작하는 ‘접시꽃 당신’은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을 아리게 한다. 암투병을 하는 아내의 죽음맞이를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시인의 안타까움이 가슴으로 전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이 고스란히 코끝에 와닿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필자는 시집의 여백에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그리움을 적기 시작했다. 편지의 소통이 원활치 않던 때인지라 그저 생각날 때마다 사무치는 마음을 적다보니 어느덧, 시집 한권의 그 많던 여백이 검은색 볼펜으로 새까맣게 채색 됐다. 그 시집을 제대하기 얼마 전, 지금의 아내에게 선물로 주었고 아내가 퍽이나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도 풀지 않은 이삿짐 어느 상자엔가 먼지에 쌓여 있을 것이 분명하다.
도종환은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집으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주옥같은 시어(詩語)로 세상을 위로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중략)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는 얼마나 좋았으면 교과서에 까지 실린 ‘담쟁이’라는 시다. 누구는 여기서 실업을 고통을 이기기 위한 힘으로 얻고, 누구는 부조리한 사회의 벽을 넘기 위한 에너지를 읽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아름다운 시어를 통해 마음의 찌꺼기를 정화하는 카타르시르를 느끼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시는 읽는 이의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시인 도종환의 국회진출로 정파성을 없애기 위해 도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 빼기로 했던 당국이 재검토에 들어갔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선관위도 선거법위반이 아니라고 거들었으니 좋은 결론이 날 것으로 기대된다.
제발, 모든 것을 정치의 잣대로 마름하려는 우리사회의 병폐가 없어지길 기대한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