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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영호"사도세자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지난 6월 한 달 동안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사도세자 특별전이 열렸다. 사도세자 사후 250년 만에 처음으로 마련한 행사였다. 용주사와 장서각 등에 보관되고 있던 사도세자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한 자리에 모았기에 볼거리가 풍성했다. 특히 28일에 열린 학술회의에는 전국 각지에서 방청객이 몰려들어 의자가 모자라 급기야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서 경청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원·화성·오산은 1789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융·건릉, 독성산성 세마대는 세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물론 세 곳 모두 사도세자와 아들 정조의 숨결이 짙게 묻어 있다. 필자도 사도세자 특별전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고, 학술회의에는 토론자로 참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혜경궁 홍씨가 기억하는 남편 사도세자의 모습과 정조가 그리는 아버지 사도세자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아들 정조는 아버지를 기상이 늠름하고 무예에 뛰어났으며 효종의 북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대장부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아내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이상성격, 혹은 정신병자로 묘사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혜경궁의 《한중록》은 교과서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조가 아버지의 생애를 정리한 《현륭원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정조가 그린 사도세자를 살펴보는 것도 무익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의 명으로 15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세자는 창덕궁 후원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다. 효종이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수련했던 청룡언월도는 힘 센 장수들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고 하는데 세자는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었다. 또한 활을 쏘는 실력이나 사나운 말도 잘 다뤄 영조는 그런 아들을 “태산을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고, 조현명은 “과연 세자는 효종을 빼닮았습니다.”라며 칭송했다.

1759년, 스물다섯 살의 세자는 군사무예 18가지를 그림과 설명으로 정리한 《무예신보》를 편찬하여 훈련도감을 배포, 장수들이 무예를 익히도록 하였다. 이듬해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으로 가던 길에 수원부에 들렀다가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전적지 독산성에 올라 운주당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온양행궁에서도 활을 쏘았는데 5발을 모두 맞추었다. 세자는 온양온천을 오가면서 백성들의 호소를 경청하고 어려움을 풀어주어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세자는 부왕 영조의 눈 밖에 난 지 이미 오래였다. 정조는 영조와 세자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간사한 무리들” 때문에 빗어진 일로 단정하고 있다.

1762년(임오) 윤5월 13일, 세자는 세자로서의 자격이 박탈되어 서인 신분으로 뒤주에 갇혔다. 11살의 세손이 달려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 주세요!”라고 애원했지만 영조는 외면했다. 여드레가 지난 21일, 굶주림과 더위에 시달리던 세자는 뒤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28세. 영조는 아들이 죽자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죽음을 애도 한다’는 뜻의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임오화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영조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정조는 영조에게 요청하여 《승정원일기》등 사료에서 아버지와 관련된 기록을 지워 버렸다.

1776년 조선 22대 국왕으로 즉위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과 추숭작업을 벌였다. 1789년 가을, 정조는 세자의 무덤을 천하명당이라는 수원부 화산으로 이장하였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때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박제가와 장용영 초관 백동수를 불러 《무예신보》에 마상기예 6가지를 더해 《무예도보통지》를 펴내도록 지시한 사실이다. 이듬 해 여름, 책이 완성되자 전 군영에 나누어주어 무예 교본으로 삼게 하였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 정조는 아버지가 나약한 정신병자가 아니라 건강한 심신의 소유자였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독산성에서 활을 쏘았던 것을 기념하여 자신도 독산성에 올랐다가 내려와 화성행궁 득중정(得中亭)에서 활을 4발 쏘아 명중시켰다.

아내 혜경궁과 아들 정조의 증언은 이처럼 다르다. 어느 쪽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 이번 학술회의에서도 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는지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나름의 설득력은 갖추고 있었지만, 어느 것도 진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 결국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 찾기는 ‘득중’하는 자세로 새롭게 접근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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