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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한인숙"친구야, 보고 싶다"

 

해거름 들녘으로 나선다. 일본 먼 해상을 지나고 있다는 태풍의 영향인지 바람이 제법 있다. 헝클어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기분 좋은 산책을 한다. 툭 건들기만 해도 푸른 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논엔 백로 두엇 한가롭고 멀지 않은 곳의 개구리 합창이 논두렁을 기어올라 달맞이꽃을 밝히는지 노란 잎들이 한결 싱그럽다.

밤에만 꽃이 피어 달맞이 꽃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는 꽃, 친구는 달맞이꽃을 좋아했다. 달빛 좋은 날 그 꽃을 한 아름 안겨주면서 ‘달맞이꽃을 보면 네가 보고 싶어’ 하면서 수줍어하던 친구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는 달맞이꽃을 닮았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아하고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어 그와 함께 있으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근심을 잊게 되고 웃을 수 있게 해주는 비타민 같은 친구다.

풀을 보고 있으면 풀빛이 너무 고와서 눈물이 난다며 흥얼거린 노래 한 소절로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던 그 친구가 보고 싶다. 가로등에 줄을 내린 거미를 보면서 위대한 건축가라고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캔 커피 하나 들고 몇 시간씩 인생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문학에 대해 열띤 주장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삶에는 그리 욕심을 내지 않았다.

문학을 핑계로 자식을 낳지 않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선택한 평범하지 않은 의식의 소유자, 먹는 것, 입는 것은 무엇이어도 상관없지만 정신이 올곧지 않으면 용서 못한다며 불같이 화를 내던, 별로 잘 난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고 순한 듯 고집불통인 그 친구가 달맞이꽃 속에서 환하게 웃는다.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지만 아픈 일이기도 하다. 문득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낯설음을 읽어내는 것처럼, 그립다는 말 한마디조차 누가 될까봐 꾹꾹 눌러 담는 것은 무엇일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상상하고 바람의 전언에 귀 기울인다. 가끔이 꽃이 되어 내게로 오고 가끔은 바람이 되어 나를 흔들기도 한다. 우산 속을 비집고 들어서기도 하고 푸른 잎이 되어 속삭이기도 한다.

한 모서리가 뜯겨나간 흑백사진 같은 그리움을 나는 오늘도 뒤적인다. 가로등아래서 주고

받던 많은 말과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충고를 하면서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바라보던 눈빛을 기억한다.

생각건대 산다는 것은 그리움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먼발치에서 서성이다 산처럼 다가와 그늘을 내리기도 하고 장마 중 마당 끝에 걸쳐진 짧은 햇살 같은 것이 그리움이다.

다시, 달맞이꽃이 피었다. 달이 뜨기를 기다리며 잔뜩 부풀고 있는 꽃송이가 더없이 요염하다. 바람이 건드려도 노란 침묵 중이다. 그믐으로 치닫고 있는 달을 기다리나보다. 밤이 이슥해서나 나타나 푸르게 번지는 그 빛에 몸을 열려나 보다.

기다림은 희망이고 설렘이다. 친구를 기다리고 내일을 기다리고 또 다르게 찾아와 기억으로 남겨질 어느 순간을 기다린다. 오래된 나의 기다림이 넋두리가 되어 너의 가슴에서 피어나길... 친구야, 보고 싶다.

▲한인숙 시인=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안견문학상 대상(시)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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