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서울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달리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정오에 일본 왕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선언했지만 태극기를 흔들며 광복(光復)의 기쁨을 만끽하는 아우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가(史家)들은 이유로 당시 라디오라는 첨단 기기를 가진 조선백성이 적었다는 점과 방송 상태가 불량해 잡음이 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 일본 왕인 히로히토의 항복발표문은 평민들이 사용하지 않는 소위 ‘황족어(皇族語)’를 사용했기에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그날, 조용한 서울거리를 가장 잘 설명한 단어는 ‘무력감’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은 36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으로 빛을 잃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광복’은 준비 없이 들이닥쳤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난 것은 1919년의 일이었으며 이후 태극기를 구경한 조선인은 극소수였다. 오죽하면 당시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송진우조차 해방시점에서 태극기의 형상이 감감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물론 해외에는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를 비롯 이승만 등의 미주(美洲) 독립운동세력이 존재했고 만주와 러시아를 발판으로 한 독립단체도 활동 중이었다. 또 장준하, 김준엽 등 인생을 조국독립에 다걸었던 열혈청년들은 무장교육을 받고 조국 진입 명령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좌우 이념과 상관없이 광복의 날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는 세계사의 급물살 속에 조국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없었다. 한반도의 운명은 열강끼리의 전쟁을 통해 재단됐다. 패배한 일본의 운명은 물론 ‘빛을 다시 찾은’ 우리의 운명까지도 그들의 손에 의해 맡겨졌다. 우리나라가 빛을 다시 찾은 그날, 1945년 8월 15일은 그런 상황 속에서, 그렇게 조용히 다가왔다.
2012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에서는 만세소리가 힘차게 울러났다. 광복 67주년 행사장에서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불굴의 의지로 도전하고 열심히 뛰어서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이는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통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됐음을 확인한 것이다. 특히 “누구를 괴롭히거나 누구로부터 빼앗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땀 흘려 일해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결실”이라는 말에는 우리민족이 살아온 이력과 미래를 향한 원칙이 담겼다고 본다.
우리는 광복이후 67년이라는 한 세대동안 도전과 응전을 통해 꿈을 이루어 왔다.
이제 발목을 잡는 무력감을 떨치고 두려움없이 미래로 향해야 한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