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 16일 서울의 한적한 동네의 가정집에서 탈주범 4명이 인질극을 벌였다. 이들의 인질극은 경찰과 극한 대치 끝에 주범인 지강헌이 사살되고, 2명은 자살하는 참극으로 막을 내렸다. 호송중인 범죄인이 탈주하고, 인질극까지 벌인데다 대부분 목숨을 잃는 대형사건이어서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보다 지강헌의 입을 통해 터져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피맺힌 외침이 우리사회를 더욱 흔들었다. “돈 있으면 죄도 없고, 돈 없으면 죄가 있다”는 말로 풀이되는 탈주범의 외침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정문일침(頂門一針)하는 것으로 회자됐다. 지강헌 등이 탈주한 원인은 그들에게 내려진 과한 형량이었다. 10~20년씩의 형량을 선고받은 이들은 자신들과 달리 돈있고, 권력있는 자들은 아무리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도 빠져나가는 사회현상에 좌절했다.
지금까지 대기업 오너들은 소위 ‘국가경제에 기여한 공로와 대기업을 운영해야 할 주체’여서 특혜를 받았던게 사실이다. 그동안 법정에 섰던 대한민국의 그룹총수들은 한결같이 위와 같은 이유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교도소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주, 기업과 기업주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서는 판결이 내려졌다. 올림픽 뒤풀이와 독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마찰 속에서도 단연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킨 판결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을 대상으로 내려졌다. 서울서부지법 제12형사부는 회사에 수천억원의 손실은 끼쳐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혐의로 기소된 김 회장에게 징역 4년과 벌금 51억원을 선고하고 김 회장을 법정구속했다. 대기업들은 이 판결에 숨죽이고 있다. 최태원 SK그룹회장 등 그룹오너들의 재판이 연이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번 판결을 “세상이 변했다”는 증좌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반면 국민들은 주심 재판관인 서경환 부장판사의 팬카페를 만들어야 한다는 등 크게 반기고 있다.
백면서생인 필자가 김승연 회장에게 개인적인 반감이 있을리없다. 또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한화그룹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국민들은 재벌오너들의 재판상 특혜를 지켜보며 좌절했음을 기억한다. 국민들에게 실망을 준 범죄 보다 불공평한 판결이 준 좌절은 국민들을 울분케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전무죄는 서민들에게 안겨준 최고의 좌절감이었다.
이번 판결이 국민 감정을 한순간 어루만지는 쇼잉(showing)이어서는 안된다.
이번 판결은 우리사회 공동의 선(善)인 ‘정의와 공의’가 실천되는 첫 단추가 돼야 한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