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뱉어 낸다
다정하게, 우아한 칼질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은지 모르는 채
어떤 의심도 없이 또박또박 나를 잘라 내는
너의 아름다운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한껏 비루한 사람이 되어
저녁 위를 떠다닌다
텅 빈 하늘에 흐릿하게 별이 떠오르듯이
내가 너의 문장 속에 지워지지 않는 /
글자로 박히듯이
귀는 자꾸 자라나 얼굴을 덮는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에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자
나는 나로부터 흘러나와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열리지 않는 이중의 창문.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함부로 살해되는 모음과 자음처럼
아무도 죽어 가지 않는 저녁에
침묵의 벼랑에서 불현듯 /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처럼
멸종된 이국어처럼
나는 죽어 간다, 이상하도록 푸르른 이 저녁에
휴지통에 던져진 폐휴지처럼 살기로 하자,
네가 던진 글자들이 툭툭 떨어졌다
상한 등껍질에서 고름이 흘러내렸다
네가 뱉어 낸 글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자
그렇고 그런 사람과 그저 그런 사람 사이에서
네 개의 다리가 돋아났다
개라고 부르자 개가 된
그림자가 컹컹, 팽개쳐진 나를 물고 뒷걸음질 쳤다
- 김경인 시집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2012년/민음사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 좌표를 종종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를 통해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타인은 나의 비좁은 방에 걸린 깨어지기 쉬운 거울, 길을 잃기 쉬운 깊은 숲 속에서 맞닥뜨린 수면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호수와 다를 바 없지만 나를 들여다보는 나를 또한 내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까닭에 나는 수많은 너의 사이에서 아름다운 입술을 가진 네가 뱉어 내는 대로의 사람이 되어 죽어가기도 합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해하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두 다리로 선 사람이 아니라 네 개의 다리가 돋아난 짐승의 저녁이 난무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사건, 저녁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진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