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후보, 그는 누구인가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가 16일 제1야당의 정권 재탈환을 위한 대표주자로 선출됐다.
1년 전만 해도 그가 대선 주자의 지위에 오르리라고 본 이는 많지 않았다. 정치인의 삶을 원치 않았던 문 후보가 현실정치에 뛰어들 것이라고 예상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문 후보의 삶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인권변호사였던 젊은 시절에도, ‘왕수석’으로 통하던 청와대에서도 노 전 대통령이 옆에 있었고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상주역을 맡아 마지막 곁을 지켰다.
■ 유신반대로 구속…특전사 복무= 문 후보는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가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생각으로 월남한 것이 남한 정착으로 이어졌다. 문 후보 가족은 문 후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산 영도로 이사했지만 연탄배달을 하고, 때로는 성당의 식사배급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가난했다.
문 후보는 경남중·고를 거쳐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반유신’ 투쟁에 나선 운동권이었다. 1975년 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시위를 주도하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문 후보는 석방되기 무섭게 강제징집돼 특전사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에 투입될 정도로 ‘정예용사’였다.
■ 노무현과의 만남…인권변호사 길로=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후보는 판사를 희망했지만 시위전력 탓에 좌절됐다. 변호사 길을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노무현 변호사였다. 첫 만남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동업을 결정했다.
6월항쟁이 있던 1987년 5월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됐을 때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문 후보가 상임집행위원을 맡을 정도로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문 후보는 부산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나 노동운동 지원 일에 매달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 후보는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업무적으로’ 다시 결합했다.
■ 청와대 왕수석…마지막 비서실장= 대선이 끝난 후 노 전 대통령은 문 후보를 붙잡았다. 청와대 생활의 시작과 끝을 노 전 대통령과 함께했다. 2번의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이 그것이다.
민정수석을 맡은지 채 1년이 못된 2004년 2월 그는 사퇴했다. 민정수석 사퇴 후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지만,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 심판이 기각된 뒤 그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비서실장을 맡았다.
■ 정치인 변신 후 대선주자까지=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의 김해 봉하마을행과 함께 문 후보도 양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때 그는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장례 전반을 관장했고,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한사코 현실정치 참여를 거부하다 작년 말 ‘혁신과통합’을 통해 야권대통합에 참여해 민주통합당 창당에 일조했다. 지난 4·11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나와 당선된 후 대선후보의 길로 들어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그에게 친노의 적통 자리를 물려줬지만 참여정부의 공과를 모두 안고 가야 할 책임까지 지웠다. 항상 따라다니는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대통령 후보 문재인’을 각인시키는 것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