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은 갑자기 찾아 온 첫 추위에 놀라 단풍이 빨리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잦은 가을비는 예상을 뒤엎고 아직도 고운 단풍이 가을의 끝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가을비를 일컬어 떡비라고도 하는 말이 있는데 요즘에는 마트에서 사계절 떡을 팔고 있어 구태여 가을비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떡 생각이 나면 아무 때나 떡을 먹을 수가 있다.
하기야 어려운 시절에는 밥 먹기도 어려우니 떡은 무슨 날이나 아니면 핑계를 만들어야 먹을 수 있어 그런 말이 나왔으려니 짐작이 간다.
예전에 형편이 아주 어려운 집에 손님이 와서 며칠 지나도 갈 기미가 안 보이자 그만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라 심란한 마음에 가을날 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주인이 방문을 열고 “이제 가라고 가랑비가 내리는구나” 하니 마땅히 갈 곳이 없던 나그네는 뒷문을 열며 그 말을 받아 “아무리 가려고 해도 더 있으라고 이슬비가 내리는구나” 하더라는 얘기가 있다.
여기서 한 술 더 뜨자면 출가한 딸이 친정에 와서 여러 날이 되었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시댁으로 돌아갈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시집살이 하느라 고생이던 딸이 오랜만에 만나 처음에는 반갑고 기쁘기도 했지만 하루하루 지나고 나니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었다. 시무룩한 딸의 속을 도무지 알 길이 없던 차에 비가 내렸다.
“얘야, 이제 집으로 가라고 가랑비가 곱게도 내리는구나” 하자 “어머니, 더 자라고 잔비가 어쩜 이렇게 조용하게도 내리네요” 하며 딸이 베개를 고쳐 베고 돌아눕는다는 우스개도 있지만 같은 빗소리를 듣고도 입장에 따라 각각 다르게 듣게 마련인가 싶다.
가을에는 비가 내리고 나면 기온이 떨어진다. 농촌의 가을걷이가 끝나고 한 해를 공들인 단풍잎도 하루 이틀이면 떨어지고 빈 가지만 남는다.
지금도 밖에는 올해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가을비가 제법 소리를 내며 유리창으로 쏟아진다.
빗소리를 들으며 청춘들은 빗줄기가 빼빼로를 닮았다며 이벤트를 생각할 테고, 떡집에서는 빼빼로보다는 쭉 뻗은 가래떡이 수능을 치른 수험생 앞날이 쭉쭉 뻗으라고 가래떡을 선물하라는 얘기로 듣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냥 웃자고 해 보는 얘긴데 정작 나에게는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을 서두르라는 얘기로 들린다.
밖에서 우산 접히는 모습이 보이고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어머님 손에 커다란 봉지가 들려있다. 큰 봉지 안에 내용물이 담긴 올망졸망한 봉지가 나오는데 이 무슨 조화인가?
평소 친하게 지내시는 형님께서 김장을 하셨다며 배추와 쌈을 고루고루 싸 보내시며 며느리 주라고 하셨단다. 정말 먹을 복 한 가지는 타고 난 것 같다.
저녁에 막걸리라도 한 잔 곁들여야겠다. 그때 가서 가을비는 또 무어라 속살거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