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구성을 위해 인재를 구하는 때이자, 공무원들의 인사철이다. 각종 매스컴이나 공직사회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좋은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교묘한 언론플레이나 줄대기는 여전하고,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한 고도의 작전도 펼쳐진다.
기원전 250년대를 살았던 모수(毛遂)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그 유명한 모수자천(毛遂自薦)과 낭중지추(囊中之錐)의 고사성어를 만든 그 모수다.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이 판치던 중국 전국시대에 조나라는 한반도와 같이 강대국의 틈새에 끼여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시대를 호령하던 진나라가 수도를 포위하는 국란이 벌어지자 총대를 멘 것은 조나라 혜문왕의 동생이자 명재상으로 추앙받던 평원군이었다. 살 길은 진나라와 어깨를 견주는 초나라와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었고, 초나라 왕을 설득하기 위한 20명의 사절단을 조직하는데, 자신의 식객 3천명 중에서 19명은 선발했으나 나머지 1명의 자리가 비었다.
고민하는 평원군에게 ‘모수가 나서 스스로를 천거(毛遂自薦)’했다. 이때 평원군이 모수를 향해 “‘주머니 속 송곳은 그 끝이 드러나는 법(囊中之錐)’인데, 그대는 3년 동안 내 문하에 있었다는데 이름을 듣지 못했다”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모수는 “저를 일찍 주머니 속에 넣어주셨다면 송곳 끝만 아니라 자루까지 보였을 것”이라고 받아친다. 평원군은 모수를 데리고 초나라로 향했다.
이후 이야기는 알려진 대로 교착상태에 빠진 회담을 모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칼을 품고, 초왕과 면대해 유려한 언변으로 동맹을 이끌어냈다. 무모한 용기나 얄팍한 혀놀림만이 아니라 평소 다져진 실력을 기반으로 목숨을 거는 기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해석된다. 초나라에서 돌아온 모수는 상객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음은 불문가지다.
모수의 활약상에 가려있어 그렇지 평원군의 인물됨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은 되지 못했지만 인재를 아껴 3천명이나 되는 식객을 부양했다. 수많은 식객 중 절름발이도 있었는데, 아끼는 애첩이 이를 비웃자 그 애첩의 목을 벤 것이 평원군이다. 그런 소문에 수많은 인재들이 평원군의 품으로 몰려들게 했다.
모수와 같이 자천할 정도의 인물이 많아 국가의 동량으로, 경기도와 인천시의 인재로 활용되길 원한다. 하지만 자천은 있는데, 실력과 기개를 갖춘 인물이 없어 보인다.
인재를 고르는 안목이 지도자의 제1덕목이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