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김지하가 39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신시절 대표적 저항시인으로 정치인, 장군, 재벌 등을 풍자한 ‘오적(五賊)’을 발표하고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까지 받은 그였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에 대학에 다니던 이들은 딱히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김지하를 안다. 당시 김지하라는 이름은 금기어이자 불온한 이름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각 대학에서는 김지하의 저항시를 등사기로 복사해 읽으며 그의 시대정신에 몰입하는 ‘지하의 밤’ 행사가 줄 이었다.
김지하의 시는 시원했다. 똥을 똥이라고 하고, 된장을 된장이라고 말했다. 숱한 고초를 겪으며 그의 시는 날 선 저항의식을 넘어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하는 상징이 됐다.
우리사회가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김지하의 이름은 서서히 잊혀 갔다. 간혹 생명사상에 심취한 그의 글이 언론에 비치기는 했지만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랬던 그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했다. 박 당선인을 지지한 것이 잘못은 아니다.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색안경을 통해 보는 이들이 없으리라는 안도감에 이야기하건만 김지하의 박근혜 지지는 당혹스러웠다. 건강한 보수와 유능한 진보를 원하는 중립지대의 백면서생이 보더라도 이상했다.
인생을 달려가는 이들에게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데 필요한 표징이 있다. 빨간벽돌집, 노란대문집, 낮은 울타리의 공원 등이 이정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노란색 대문이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지면 목적지 찾기가 쉽지 않다. 경험이 부족한 초행의 젊은이들은 더하다.
김지하는 법원판결 후 돈이 없어 아들을 대학에 진학시키지 못한 회한을 토했는데 외롭게 살아온 70대 노 시인의 외로움이 전해진다. 자기희생을 통해 역사발전의 수레바퀴를 돌렸건만 수레는 돌아가도 아무런 보상이 없는 허탈감도 읽을 수 있다.
그래도, 아무리 몇 날을 고민해도 김지하의 자기부정은 과거와의 화해라는 말로 해석되기에 부족함이 있다. 또 그로 하여금 정파적 판단을 하게끔 만든 이 세상의 정치에 핍진케 된다.
빨간벽돌집과 노란대문집을 그저 그 자리에 두는 게 길 찾기에 도움이 된다.
오늘따라 타는 목마름으로 답답하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