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음에도 매서운 추위가 가시질 않는다. 24절기 중 하나인 입춘이 되면 동풍이 불기 시작하고 얼음이 풀리며 벌레들이 깨어나고 봄이 열린다고 했다. 동장군이 제아무리 눈발을 뿌리고 대지를 꽁꽁 얼어 붙여도 농부들은 겨우내 버려두었던 논밭을 돌아보고 일 년 농사 설계를 한다.
추워서 게을리 했던 호조벌 산책을 나섰다. 봄이 열리는 것을 알려면 들판을 나가보는 것이 우선이다. 호조벌은 언제 봐도 평화롭고 잔잔하다. 바둑판같이 반듯하게 펼쳐진 논길을 걷노라면 품었던 생각들도 반듯하게 정리가 될 듯이 편안하다.
호조벌의 여러 갈래 논길 가운데 미산동 앞에서 매화동 가는 논둑길을 걷기로 했다. 아마 따뜻한 봄소식도, 풍요로운 가을이야기도 저 농로를 타고 호조벌 전역으로 들어왔다가 돌아가리라. 매화동 쪽에서 짚단을 세워놓은 풍경을 만난다. 요즘은 추수를 하면 짚을 소 먹이로 쓰기 위해 비닐 포장해서 거둬들이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는데 짚단가리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옛일이 새삼 그립다. 논에서 잘 마른 짚단을 소의 먹이로 쓰기 위해 며칠씩 집으로 끌어들이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행여 비라도 오면 짚단이 젖을까봐 노심초사하던 일이 엊그제 같다.
문득 멀리 연기가 자욱이 이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하고 자세히 보니 올 농사 채비를 하는 농부들이 논둑을 태우고 있다. ‘요즘은 특히 불조심해야 하는 시기인데 불을 놓는구나’ 생각하였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지키고 서서 잡풀 더미들을 태우고 있다. 봄에 밭이나 논 주변에 불을 놓아 마른 풀을 태우는 이유는 잡풀씨를 태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병충해 방지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멀리 한 뙈기의 붉은 논이 보인다. 이번 겨울에 객토를 한 논이다. 한 해 농사를 짓기 위해서 농부들은 지난해를 돌아보며 논의 성질을 파악하여 일철이 시작되기 전에 논을 고르거나 돋우기도 하는데 장마철에 침수된다거나, 논바닥이 깊어서 배수가 잘 안 된다거나, 흙의 힘이 없는 논은 겨울철에 객토를 해서 논바닥을 높이기도 하고 흙의 힘을 도와주기도 한다. 붉은 흙의 논은 다른 논들보다 깊어서 배수가 잘 되지 않아 논바닥을 높여 객토를 한 듯하다.
드넓은 호조벌을 한 바퀴 돌아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집집마다 대문 앞에 거름포대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농사 준비를 하고 있음이 눈에 뜨였다. 아마도 곡식 광에 곡식을 듬뿍듬뿍 쌓아놓은 듯 농부들의 마음은 거름 더미만 보아도 마음이 뿌듯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제아무리 동장군이 추위를 몰고 와 기승을 부려도 들판은 들판대로,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집집마다 한 해 농사를 준비하며 봄을 부르고 있다. 마당엔 목련이 금방이라도 부풀듯 봄내음을 풍기기 시작하고, 텃밭에는 냉이가 흙을 비집고 봄볕을 받으려는 듯 얼굴을 내밀고, 파밭에선 새 움을 뾰족하게 틔우는 파가 추위 속에 봄을 몰고 와 있다.
들판에 서면 드넓은 대지가 이렇게 소리 없이 봄을 부르고 있는데 이제 동장군은 제아무리 기세를 부려도 두 손 번쩍 들고 꼼짝없이 물러날 일만 남은 건 분명하다.
▲(사)한국문인협회 시흥시지부장 ▲시집 ‘연밭에 이는 바람’ 외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