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만명이 죽은 1차 세계대전은 참혹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신무기들이 등장했다. 탱크는 시체 위를 질주하고, 기관총은 난사됐으며, 독가스가 뿌려졌다.
국내에서도 전시회를 가진 독일 화가 ‘오토 딕스’는 참호 속에 널린 인간의 팔다리와 해골, 피범벅인 시체 등을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가스에 질식되어 죽은 사람들’이라는 섬뜩한 작품도 있다. 그는 작품이 너무 끔찍하다는 질문을 받으면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고 답한 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이었다.
엘리엇의 시(詩) ‘황무지’는 이런 전쟁이 끝난 후 사회상을 배경으로 한다.
영혼까지 파괴하는 전쟁의 공포와 절망, 그리고 모순된 세상에 대한 혼란이 점철된 사회였다. 시는 난해하다. 20세기 현대문학의 대표작이며,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다는 설명 자체가 어렵다. 하지만 기념비적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황무지(荒蕪地)에 등장하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만은 친근하다. 속사정은 모르지만, 4월이면 숱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2013년 4월이 지나고 있다. 사회 전체에 전쟁에 대한 공포가 드리운 채. 웬만한 만성적인 충격으로 끄떡도 하지 않던 국민들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외국의 유명 기업은 한국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대피방법을 논의했다고 바람을 잡으니, 주가는 연일 바닥을 헤맨다. 전쟁을 전문으로 하는 외국 종군기자들이 중동지역에서 한국으로 무대를 옮겨오고 있다. 어제는 남북을 잇는 유일한 통로이자 혈관이던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는 북한 당국자의 발언이 나왔다.
물론 최악의 치킨게임으로 보이는 현 상황이 카드게임의 블러핑(Bluffing, 허세)으로 결론날 수 있다. 하지만 임계점을 넘어선 공포는 상처를 남길 것이 분명하다. 이 땅에 봄은 왔지만, 벚꽃을 노래하지 못하는 현실은 황무지에 다름없다. 2013년 4월은 하릴없이 지난다 해도 다음 4월이 진정 ‘가장 잔인한 달’이 될까 하는 두려움은 여전할 것이다.
황무지의 마지막 행은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로 매듭 된다.
먼지와 함께 전쟁의 광기를 날려버릴 4월을 갈망한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