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은 원심력으로 팽창하는 파장의 소리다. 세상은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있다. 그렇다고 그 소리들이 다 외침은 아니다. 음향이 있다. 자연의 소리와 인공으로 만들어진 소리들이 그 음향의 구성들이다. 자연의 소리는 질서정연한 것이 핵심이다. 그리하여 조화로운 화음으로 생명력이 있다. 그러나 인공의 소리들은 둔탁하다. 아마도 생명성이 없는 사물에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보면 타인의 외침소리를 들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외치는 경우도 있다. 억울한 사연을 가지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구조요청을 처절하게 외칠 때도 있다. 그러나 사회는 그 소리들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들어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사회의 한 단면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는 겉으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다. 말로는 최소한이나마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반향이 없다. 공허한 메아리다. 그것은 수사학(修辭學)적 기호에 불과하다. 현실 속에서는 세워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외치겠는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만 공허하게 메아리쳐서 이곳저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1인 시위를 통하여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경우가 있다. 개인은 침묵한다. 그 입장에서 보면 딱히 그 소리를 듣고 반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개인이 지고 가기엔 벅찬 경우다. 자신과 무관한 일에 참견한다고 오히려 비판의 화살을 맞는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엇엔가 예속되어 있다. 자유는 수사학적 기호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유가 없다. 구성원들 간의 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 그 자유의 가치는 높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다지 믿고 신뢰할 만한 사회 구조 속에 놓여 있지 않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개인들이 증가할 때 사회는 그야말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나’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외치거나 수행할 것이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구차하게 이런 일에 나서서 자칫 잘못하면 오발탄을 맞거나 된서리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살 만한 사회라고 감히 단언할 수가 있겠는가? 개인은 양심이 있어서 양심대로 반듯하게 정직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회를 보면, ‘정직하고 양심 바르게 살자’라고 말하기엔 여간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냥 이쯤에서 적당히 하자’란 태도가 가장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에 널리 팽배해져 있다.
그러나 한편 진정으로 침묵하는 슬픔이 있다. 그 처절한 외침을 듣고도 침묵해야 할 존재의 심적 상태는 어떠할 것인가? 곱디고운 마음이 있다면 아마도 갈래갈래 찢겨져 있을 것이다. 절박한 절망의 심연에 떨어져 처절하게 구원의 손을 벌리며 외치는데, 정작 그 외침의 소리를 들은 존재는 그 문제를 능히 해결해줄 수 있음에도 외면해야만 할 사회적 상황이라 내적으로 통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사랑하나 공의롭기 때문에 처절한 외침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우리 범인(凡人)들도 작은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배려하고 사랑하는 자세로 수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슬픈 침묵 이외에는….
▲ 고려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 경기예총 2012년 빛낸 예술인상 수상 ▲ 한광여중 국어교사 ▲ 전 (사)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 지부장 ▲ 시집-『카프카의 슬픔』(시문학사·1992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