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늬엇늬엇 넘어갈 무렵의 교동시장 좁은 골목, 진득한 땀 냄새가 풀풀 날리는 인간터널을 지나 코너를 돌아가면 사람들 바글바글 모여앉아 먹거리 한 상씩 받아 안고 있는 아지매 분식집이 보인다. “납짝 만두 1인분, 오징어 야채전 1장, 양념 오뎅 1인분이요.” 마주 앉자마자 수다를 화수분으로 뿜어내는 풋풋한 젊은이들의 공간. 지붕이 빨갛다고 빨간 집으로 통했던 아지매 분식집에서 내다보는 교동시장의 골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입술이 두툼한 순대아줌마는 연신 순대를 썰어대며 한 손으로 소금을 퍼내고, 배불뚝이 아줌마는 턱밑 비지땀을 앞치마로 바쁘게 훔쳐대며 지글지글 몸부림치는 오징어·야채전 뒤집기에 여념이 없다. 야한 속옷가게 젊은 남자 종업원의 호객행위에 놀라 양 볼이 빨개진 미니스커트 어린 아가씨는 얼음 미숫가루 한 사발로 열을 식히고, 골목 난전 낚시의자에 쪼그려 앉은 모시저고리 할머니는 양념 오뎅집 오뎅 국물이 튈까봐 자꾸 가자미눈으로 가게 쪽을 흘겨본다.
그런데 휑하다.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골목이 이렇게 넓은 줄은 미처 몰랐다. 딱 25년만인가 보다. 그 왁자하던 도깨비 시장, 요란했던 골목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딸아이와 기차여행을 대구로 잡은 건 엄마의 과거사 한쪽 귀퉁이만이라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젊어 한때 청춘을 바치며 열정적으로 살았던 도시의 언저리. 이제 그 시절 엄마 나이가 된 딸아이에게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었었다. 그런데, 그때 그 시끌벅적한 열정은 모두 사라지고 한적하고 정갈한 무늬뿐인 골목으로 남아있다니. 마치 서서히 정리되어 띄엄띄엄 남겨진 내 추억속의 그림처럼.
수입 자유화로 번화했던 도깨비 시장도 사라지고, 시장골목 정비로 길거리 난전이 가게 안으로 모두 들어가면서 넓고 깔끔하게 변했다는 골목. 골목이 깨끗해지면 손님이 더 많아지련만 교동시장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한가하게 가끔씩 드나드는 손님뿐. 그래서 그런지 가게들도 모두 철수하고 한두 군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근무하는 사무실과 가까워 퇴근하면 참새가 드나드는 참새방앗간 마냥 자주 들락거렸던 그 빨간 지붕 아지매 분식집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세월만큼 주름 잡힌 손등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던 칠순 노파가 된 주인 아지매가 너무 반가워 눈물이 핑 돌았다. 세월은 그곳에서도 그렇게 멈추어 있지는 않았나 보다. 지금껏 남아 있는 사람들은 왁자했던 지난날의 영화를 잊을 수가 없어 지난 시간, 그 애착에 떠나지 못하고 그 세월과 더불어 늙어가고 있는 거라 했다.
매일 출퇴근하며 걷던 동성로 그 지하도를 지나 사무실이 있던 ‘태남빌딩’을 발견했을 땐 그 옛날로 돌아온 듯 사진도 찍어보고 드나들던 음악다방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 근처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추억속의 시간들은 그렇게 켜켜로 접혀져 있었다. 어느 날 그 시간이 그리워 꺼내보면 접혀진 시간만큼 색깔이 바래기도 하고 간혹 글자가 지워져 사라져 버리기도 하듯, 사라진 것들과 그대로인 것들을 띄엄띄엄 연결해가며 맞추어 보면 그때 그 그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주얼리 특화 골목으로 변해 버린 동성로 뒤안길을 돌아 약정 골목으로 접어들 때쯤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추억의 장면이 또 한 번 스르르 펼쳐졌다. ‘해는 늬엇늬엇 넘어가고, 오늘 마감시제도 딱딱 맞았고….’ 친구랑 물랑루즈에서 스테이크에 와인 한 잔 할 생각에 샐쭉이 벌어진 입 꼬리 매달고 동성로 한일 극장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다. 시간도, 생각도, 또각또각 그날 그 시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