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을에 들리는 눈 소식을 접하며 철부지처럼 탄성을 질렀다. 저렇게 아름다운 곳은 어디일까? 저런 곳에서 딱 하루만 살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꺼놓고 깨끗한 공기로 가슴속을 채우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날리는 눈이 살갗에서 녹는 산뜻함을 앞당겨 느끼고 싶은 유혹이 간절했다. 하얗게 변한 나뭇가지며 마른 들꽃을 바라보다 늦게야 잠을 이루느라 아침 산새들이 몇 차례나 깨우는 것도 모르는 채 잠도 잘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부지런하신 어른들은 두툼한 옷에 마스크까지 하고 새벽 운동을 다녀오시고, 인력 사무실 앞에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길을 함께 걸으며 길지 않은 동안 많은 얘기가 오고간다. 누구네 집 어머니가 결국 요양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제는 거슬리지도 않는 소식과 어느 집 남자는 부지런하기도 해서 농사일 틈틈이 잣을 따서 몇 가마를 했다는 얘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엇갈리며 엷은 무늬를 새긴다.
그러다 올해는 포도도 풍년이라 좋아했지만 추석이 워낙 빠른 탓인지 대목을 그냥 놓쳐 즙을 짜는 집이 많다고 한다. 원래 여름 농군, 겨울 신선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농한기가 따로 없기도 하지만 땀 흘려 농사지어도 판매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서울에 잘 사는 친척이나 친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단순히 길거리 가판대에 의존하는 경우라면 사정은 어려워진다. 풍년이 들어 소출이 많아도 통장으로 돈이 들어와야 소득인 것이다. 그것도 인건비나 농자재 대금을 제하고 나면 한 해에 한 번 수입을 바라보고 땡볕 아래서 모기와 싸우며 일하는 농민들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마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루는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의 활짝 웃는 얼굴이 나른함을 깨고 들어온다. 반갑게 맞아 점심을 먹는 자리에 포도 농사를 짓는 친구를 불렀다. 친구의 근황을 물으니 잠긴 목소리는 한숨부터 쉬더니 일에 치어 죽을 지경인데 포도는 안 팔리고 내년에는 농사를 줄여야겠다고 한다. 식구대로 고생고생 해서 농사 잘 지으면 뭐하느냐고 하소연이 늘어진다. 서울에서 온 친구가 추석 선물로 팔아준 물량도 꽤 되는데 여태 붙들고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하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주문을 받아준다.
두 친구는 서로 고맙다거니 미안하다거니 하며 포도 가판대로 향했고, 덕분에 나까지 포도를 먹게 되었다. 이 고장에 살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거들지 못해도 쉽게 먹으면서 흔한 게 포도라 그냥 남의 일로만 여기고 살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다음부터 내가 먹는 포도 한 알이 더 맛있고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가 선물 얘기만 하면 포도가 선물로는 최고라고 하며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도 포도 자랑을 한다. 요즘도 길을 가다 보면 쌀쌀한 날씨에 가판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이웃을 볼 수 있다.
누구라도 고향이 있고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 그리움의 한 가운데 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떠올리면 그들에게도 이 가을이 아름다울지, 출렁이는 억새의 몸짓이 눈에 들어올지 궁금하다. 포도송이가 눈에 밟히는 만추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작가 신인상 수상 ▲가평 문학상 수상 ▲가평문인협회 이사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