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흰색 테두리 안에 노란 물방울이 떨어진 듯, 마치 계란 프라이(fried egg)처럼 생긴 꽃이 있다. 개망초다. 북미가 원산지인 이 꽃의 씨앗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 한국에 파병된 미군의 주머니와 배낭에 묻어 들어왔다. 포성이 멈추고 지상의 모든 생물들이 평화롭게 지낼 즈음, 땅을 헤집고 슬그머니 고개를 든 풀이 있었다. 이 풀은 번식력이 너무 좋아 순식간에 논과 밭을 온통 하얀 꽃으로 뒤덮게 만들곤 했다. 당시 헐벗은 국민들은 흰 꽃의 낭만을 즐기기보다는 허기진 배를 채울 한 톨의 알곡이 더 소중했다. 농부들은 논밭을 점령해 버린 잡초를 제거하고 또 제거해도 끝이 보이지 않자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이번 농사는 개 망조(亡兆)가 들겠구만”이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망할 징조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개’자를 붙였는데 그때부터 이 흰 꽃은 개망초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먹고살만한 시대가 되었다. 전후 잡초로만 인식되던 풀이 이제 웰빙(well-being)식품으로 가치가 높아졌다. 어린 순은 망초나물로 우리의 식욕을 돋우는가 하면 들녘에 활짝 핀 꽃은 연인들의 낭만적인 데이트 장소로 변모했다. 농촌 소득증대의 그늘에 가려져 쓸모없는 잡초로만 여겨졌던 개망초의 화려한 변신이다. 개망초처럼 시대상황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주장도 달라질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파벌적인 진영(陣營)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지방선거, 총선, 대선을 치르면서 적잖은 국민들이 서로의 진영 논리에 갇혀 좀처럼 상대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지성인들의 보고(寶庫)라는 대학에서조차 독선적인 진영 논리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소위 보직교수라는 일부 인사들은 자신만이 객관적·합리적 판단을 하고 있다는 인식의 오류에 빠져들곤 한다. 그리고 타(他) 진영의 약한 교수들을 괴롭힌다. 그것이 힘 있는 교수들의 연합이라면 힘없는 진영의 교수 하나쯤은 간단히 바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렇기에 힘없는 자들은 힘 있는 자들의 입만 바라보며 추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강하다는 사람의 진영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다. 물론 모든 대학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부, 아주 극히 일부 대학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통상적으로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발생한다. 서로 통하는 사람끼리, 이념이 같은 사람끼리 얘기를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진영의 논리는 더욱 강화되고 다른 진영의 논리는 쓰레기로 치부된다. 서로 다른 진영의 논리는 맞서기만 할 뿐 객관적인 타협점을 찾기 어렵게 돼 있다. 이러한 적대적 대립 양상을 사회통합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실체적 진실은 뒤로 미룬 채 오로지 자신의 진영 논리만을 주장하다보니 종종 진실을 거짓으로, 거짓을 진실로 호도(糊塗)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보니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조차도 침묵의 보신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괜히 중재에 나섰다가는 자신도 진영 논리 주장자들에 의해 희생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한국경제학회의 최근 논문에서는 한국의 관용도가 31개 OECD 회원국 가운데 31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관용도가 꼴찌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공존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름 괜찮은 들꽃 개망초는 한때 잡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바뀌자 웰빙과 낭만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 번 잡초는 영원한 잡초라는 예삿말을 깬 사례다. 개망초의 예처럼, 현재 옳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진영 논리도 시·공간이 바뀌면 타 진영의 논리에 비해 아주 열등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와 다른 타인, 우리와 다른 저들의 논리가 진정 그릇된 것일까? 새해에는 나 자신부터 인내와 관용을 바탕으로 배려를 생활화하여 편협한 진영 논리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