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이 내린 날 아침에 보이는 풍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다. 욕심껏 눈을 지고 어깨가 축 늘어진 소나무로 가득한 산은 일 년 내내 입는 검푸른 옷을 버리고 모처럼 하얀 옷으로 갈아입는다. 좁다란 들길에 강아지풀이나 쑥부쟁이 같은 이미 말라 죽은 잡초의 초라한 몰골에 이르기까지 눈꽃이 핀다. 선인들도 눈을 아름다운 꽃이라 여겨 육출화(六出花)라 불렀다고 한다.
예전에 숫눈을 밟고 걸을 때마다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신기해서 몇 번을 멈춰 서서 유심히 보기도 하고 일부러 발에 힘을 주고 꼭 눌러 밟기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손가락 끝으로 바둑이 발자국을 만들고 울음소리를 흉내 내기도 하고, 두 주먹을 쥐고 소발자국을 만들면 소처럼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소처럼 걷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도 싫증이 나면 발꿈치를 꼭 붙이고 깡충깡충 뛰면 파란 바탕에 흰색으로 그린 유엔 깃발에서 본 적이 있는 월계수 잎이 생겨나기도 하고 한쪽 발로 동그랗게 발자국을 새기면 국화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워 몸의 윤곽이 새겨지면 눈 사진 찍었다고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눈싸움을 하다가 신발이고 옷이고 눈 투성이가 되어 뭉친 눈을 한 덩이씩 먹으면 왜 그렇게 시원했는지 요즘의 아이스크림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맛이 숨어 있었다.
20대에 들어서는 눈이 오면 벌써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추운 줄도 모르고 눈길을 걸었다. 그러다 손이 시리면 잡은 손을 그대로 코트 주머니에 넣고 걷다가 둘이 한꺼번에 넘어지기도 하고, 그럴라치면 아픈 건 젖혀두고 누가 볼까봐 재빠르게 사방을 둘러보고 일어나 웃으며 또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쏘다니다 늦은 시간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아버지의 호통이 마당을 건너왔다. 지금보다 교통이 나쁘고 따뜻한 옷이나 신발이 없어도 눈이 있어 행복했다.
눈이 오면 그냥 철부지들만 좋은 게 아니라 생활에도 유익했다. 요즘은 성능 좋은 스팀다리미가 있지만 예전에는 다림질을 하려면 일일이 물을 뿌려야 했는데 눈 오는 날은 잠시 밖에 걸어두면 저절로 다림질하기 좋은 상태가 된다. 그리고 본 일은 아니지만 동짓달 납일에 내린 눈을 받아 녹은 물로 차를 달이거나 약을 달이는 데 쓰면 효험이 있다고 했으니 정성과 자원 활용 면에서도 높이 살만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요즘은 미세먼지를 비롯해 그밖에 유해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그것도 영영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얼마 전 내린 눈에 오렌지 주스보다 산도가 높은 산성 눈이 내렸다고 눈을 맞는 일을 삼가라는 보도가 있었다.
하물며 눈을 먹는 일은 상상도 못할 위험한 일이 되어버렸다. 눈이 내리기 무섭게 눈을 치운다. 제설차들은 치사량의 염화칼슘을 뿌려 길은 수명을 다 한 눈으로 한동안 질척거린다. 이제 눈은 꽃도 아니요, 동화속의 나라도 아니고, 빨리 치워야할 장애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지금쯤 누군가는 눈을 공중에서 잠시 보여주고 곧바로 증발시키는 기술을 연구하는지 모르는 일이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작가 신인상 수상 ▲가평문학상 수상 ▲가평문인협회 이사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