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송천 떡 마을에 들렀다. 송천계곡을 끼고 솔숲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예전에 한두 집에서 만들어 팔던 떡이 입소문이 나면서 마을 대부분이 떡을 만드는 일에 종사한다고 한다. 민속 떡 체험관이 있어 체험을 원하는 사람은 즉석에서 떡메도 치고 인절미에 고물도 바르는 등 떡 만들기 체험을 할 수도 있는 곳이 되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하지 않아 떡 체험은 할 수 없었지만 디딜방아도 보고 널뛰기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널뛰기는 상대방과 균형이 맞아야하며 무엇보다 가운데 중심이 잘 잡혀야 한다. 남편과 뛰다보니 남편이 쿵하고 구를 때마다 나는 공중으로 튀어 올랐고 내려올 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널에서 떨어지는가 하면 바닥으로 나뒹굴곤 했다.
몸이 무거워서 그런지 생각만큼 널뛰기가 쉽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널뛰기를 많이 했다. 가마니를 둘둘 말아 가운데 중심을 잡고 널따란 송판을 올려 널판을 만들고 동네아이들 불러들여 해가 저물도록 뛰며 놀곤 했다. 동생을 널의 중심에 앉혀 놓으면 널이 뛸 때마다 뒤뚱거리기도 하고 널이 삐뚤어져 다쳐 울면서도 연실 널 위로 올라앉곤 했다.
정월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지만 그중 윷놀이가 가장 즐거웠다. 가족이 삥 둘러앉아 편을 갈라 윷놀이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편으로 갈랐고 세뱃돈 받은 것을 걸고 게임을 했다. 다 이긴 듯하던 게임이 말을 잘못 쓰는 바람에 지기도 하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윷과 모가 판을 뒤집기도 했다. 주거니 받거니 밤이 깊어지면 어머니는 떡가래를 아궁이에 노릇노릇 구워서 살얼음 동동 뜨는 동치미와 함께 야참으로 내놓곤 했다.
살기가 그리 넉넉지는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한 가족처럼 살았다. 집안의 대소사를 서로 챙겼으며 명절에는 마을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러 다녔다. 아버지는 흰 봉투를 내놓고 절을 했고 우리는 덕담과 함께 쌈짓돈을 받았다.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거나 명절에 쇠러 온 친지들 또한 마을 어른을 찾아 인사를 올리는 것을 당연한 걸로 알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대청소며 이불빨래를 하고 우리들 입을 한복을 손질하느라 며칠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맷돌을 돌려 두부를 만들고 가래떡을 뽑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이렇게 들뜬 분위기는 보름 명절까지 이어졌다. 특히 정월 대보름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여 졸린 눈을 비비며 버티다 잠이 들면 아침에 눈썹에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있어 정말 눈썹이 하얗게 된 줄 알고 놀랐던 추억들이 영상처럼 스쳐간다.
지금도 명절이 되면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고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고향과 부모형제를 찾는다. 맛난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리는 부모님이나 주차장이 된 길 위에서 조바심을 내는 자식들이나 설렘은 마찬가지일 게다.
우리의 풍습을 소중히 알고 지켜내는 일 또한 민족의 근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떡 마을에 들러 떡메는 치지 못했지만 널을 뛸 때마다 되살아나는 유년의 기억들을 되짚어본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안견문학상 대상 ▲시집-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