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조선 초기 문신 허백당(許百堂) 성현(成俔)은 전가사십이수(田家詞十二首)라는 시의 정월령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온 이웃이 술상을 차려놓고 대보름날 밤에 모여/동산 달맞이 하자고 서로 찾아다니네/달은 무심하게 떠올라 비추지만 노인들은 해마다 풍년을 점치네.”
설날이 가족 중심의 모임이라면 이렇듯 정월 보름날은 마을공동체의 단결과 번영을 위한 축제였다. 조선 후기에 저술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민속행사의 종류를 서른일곱이나 적고 있을 정도다. 영월(迎月: 달맞이), 답교(·踏橋: 다리밟기), 농악, 고싸움, 차전놀이, 달집태우기와 마을 사람끼리 편을 나누어 벌이는 횃불싸움, 논두렁과 밭두렁을 태우며 풍년을 기원하는 쥐불놀이, 아이들이 모닥불 위를 나이만큼 뛰어넘으며 건강을 빈 잰부닥불 피우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축제는 월(月) 여(女) 지(地)를 중시하는 농경시대 지모신(地母神) 의식에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특히 대보름 달빛은 어둠과 질병, 재앙을 밀어내는 밝음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 날에 동제(洞祭)를 지내는 등 개인과 집단적 행사를 해왔다는 것이다.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먹는 음식도 다채로웠다. 지금도 현존하는 대표적인 게 찹쌀, 차조, 붉은팥, 찰수수, 검은콩으로 밥을 지어 먹는 오곡밥이다. 이밖에 상원채(上元菜: 박나물, 말린 버섯, 외고지, 호박고지, 가지고지, 시래기, 아주까리, 취나물, 고사리), 작절(嚼癤·부럼: 잣 호두 땅콩) 등도 있다.
우리 선조들이 음력 정월 15일을 상원(上元)이라고도 했고, 이날 밤을 원소(元宵)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원소병(元宵餠)을 만들어 먹었다. 이는 찹쌀가루를 새알처럼 색색으로 반죽하여 삶아 오미자 국물이나 꿀물에 띄워 차게 마시는 음료인데 둥근달을 향해 소원을 빌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이날을 연등(燃燈)절로 정하고 절을 중심으로 지역마다 특색 있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모두가 중국의 원소절(元宵節)에서 유래된 것이다.
내일(14일)이 대보름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도내 각 지역에서는 대보름맞이 행사를 펼치고 참여 주민들은 일체감을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화합이 일년 내 지속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