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지방선거의 특징으로 어젠더 선점 경쟁은 없고 오직 인물만 가지고 승부하려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야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전형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이다. 어차피 여당은 방어적으로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어, 야당이 어젠더를 들고 나와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지금의 민주당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또 그런 역할을 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일단 민주당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율이 너무 낮고 반대로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은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젠더만 잘 설정하면 자신의 당에 대한 지지율을 끌어 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선거에서 가장 필요한 뚜렷한 대립 전선을 만듦과 아울러 정책 선거라는 이름마저 붙일 수 있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어젠더 선점은 야당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거수단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경제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아 야당 입장에선 여러 가지 다양한 어젠더를 선점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들이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념적 소재에 지나치게 당력을 쏟아 붓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국민들은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의혹 같은 문제도 별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기초단체장과 기초의회 의원에 대한 정당공천 폐지 문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런 문제를 들고 나와 장외투쟁이나 하고 있으니 선거에 필요한 어젠더를 만들지도 못할 뿐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이 이런 주장을 하고, 이런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는 이유는, 모든 선거가 그렇듯이, 이번 선거 역시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혹은 정권심판 구도로 만들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정권심판을 들고 나오기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너무 높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모양이다. 지도부야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지도부의 이런 시도에 발목을 잡는 당내 다수파 때문이다. 바로 친노 강경파 때문인데, 이들의 경우는 이념적 강경노선을 걸으면 지지층들이 다시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과거 운동권들이 가졌던 ‘대국민 계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과거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각자가 판단의 기준이 있는데, 이를 ‘독재 타도’나 ‘민주주의 회복’ 같은 단일화된 주제로 묶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지금의 정치 상황을 독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극히 드물고, 민주주의 문제로 불편을 겪는 이들도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정치를 한다는 정당이 여론을 읽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자기방식대로 ‘해석’하는 꼴이다.
이건 정당이 할 일이 아니다. 어쨌든 지금과 같이 어젠더는 없고 인물만 판치는 선거가 될 경우에 손해 보는 측은 민주당이다. 민주당 소속 현역 단체장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선거구도가 인물 구도로 짜이면, 선거는 인물에 대한 공격, 즉 네거티브 선거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데, 이럴 경우 현역 단체장이 아무래도 불리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만일 선거가 인물 구도로 짜이면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후보의 지지율과 정당의 지지율은 연동되기 때문에 민주당은 더욱 불리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민주당은 이런 점들을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당내에선 조기 전당대회를 통해 문재인 의원이 당의 얼굴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거꾸로 가는 시계를 차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민주당에게 지금 필요한 건 처절한 패배라는 생각마저 든다. 처절한 패배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유일한 야당의 회생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