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갑이 지나도록 살아오면서 자식으로 인해 짧은 순간이지만 이렇게 가슴이 에려본 적이 없었다. 일 년 전 딸애를 시집보내고 집에 돌아와 자기 짐을 챙겨 나간 텅 빈 그 애 방을 볼 때도 지금 같지는 않았다. 불혹에 얻게 된 녀석이 지난 춘삼월 초, 황사가 일던 날 전방으로 입대하는 데 동행했다. 늦밤 집에 돌아와 여전히 텅 빈 딸애 방과는 다르게 잠자리에서 막 튀어나온 채로 출가한 흐트러진 그놈의 방을 보는 순간 그랬다.
아내는 방바닥에 널려져 있는 그놈 옷 냄새를 맡으며 소리죽여 울었다. 자식을 전방에 보내는 모든 엄마들이 운다는 얘기를 들었다. 철원지방이 춥다지만 그나마 봄날에 입대해서 낫다는 남편의 위로는 순간 사라지고, 아내의 숨죽이는 흐느낌 소리로 인해 남편의 가슴이 에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모든 애비들도 다 그럴 것이다. 얼마 전 부산외국어대 신입생 수련회 때 건물붕괴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경은 어땠을까?
꼭 십년 전, 역주행해서 내려오던 트럭에 받혀 반신불수가 될 고비를 넘긴 사고를 겪으면서 몸이 수용할 수 있는 극한의 통점을 겪었다. 고통 안에는 무겁고 날카로운 것도 있었으며, 언어의 한계로 표현할 수 없는 다채로운 통증의 증상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고통도 사라지고 그때 얻은 교훈도 희미해졌다. 적어도 나 자신의 몸에 대한 기억은 이랬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자기 가슴에 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시간이 흐를지라도 사라져 지상에서 없어진 자식과 비슷한 또래가 지나가면 가슴이 에려오고 비슷한 옷차림만 봐도 가슴이 조여오고 자식이 좋아했던 음식을 입에도 댈 수 없는 ‘한’이 못처럼 가슴에 박혀 어느 순간순간에 폐와 심장을 찌르는 고통일 게다.
이산가족, 디아스포라의 아픔도 죽은 자식만큼보다 작지 않을 것이다. 생사를 알 수 없이 반세기 이상을 기다리는 부모는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위안부의 고통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들도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어쩌면 일본은 이들이 다 사망하여 자신들이 저지른 흔적이 없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역사교육이란 행복과 불행, 고통과 환희의 사건들을 당대가 죽더라도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전수해 주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을 교훈으로 삼아 건강하게 살도록 하려는 것이다.
비틀즈의 리더였던 존 레논의 상상(imagine)이라는 노래에는 국경이 없다면 전쟁도 없을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아픔은 결국 탐욕에서 비롯된다. 돈을 떼먹으려고 날림건물을 짓고, 권력 확장을 위해 전쟁을 하고 성욕을 증강하기 위해 곰발바닥을 먹는다. 자신은 순간의 쾌락과 지저분한 돈을 챙길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자식들은 죽고, 수많은 여성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수많은 국민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이들이 이것을 모를 리 없다.
독재자나 못된 정치인들이 어느 순간 권력 밖으로 밀려나게 되면 권력이란 무상한 것이라는 이들의 비겁한 변명에 대해 소시민들은 위축된 부러움과, 한편 이들과는 차별적으로 건강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자긍심을 가치로 삼아 살지만, 여전히 그런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지금도 정당사무실 근처와 정선의 카지노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불량한 욕망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량한 가족과 사람들이 앞으로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 아랑곳 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국민 다수가 하루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정자와 부유한 자들의 국민에 대한 감정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감정과 유사하기를 기대하는 욕망이 바로 국민의 감정이라는 점을 선거 즈음에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선량들은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