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光陰)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曠野)라는 시다. 시인 이육사는 이외에 ‘청포도’ ‘절정’ 등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의 시 한두 구절을 외우지 못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우리와 친숙하다. 또 평생 조국 독립을 위해 일관한 삶을 산 그의 인생 궤적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110년 전인 1904년 오늘(4월4일)은 그가 태어난 날이다. 그리고 올해는 그가 숨진 지 꼭 70년이 되는 해이다. 1944년 1월16일 만 40세의 나이로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기 때문이다.
육사의 40년 평생 일제에 의해 모두 17차례 투옥되었고 이국의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본명 ‘원록’(源祿)대신 ‘육사’(陸史)를 필명으로 삼은 것도 1차 투옥 때의 수인 번호인 ‘264’에서 음을 딴 것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육’(陸)이 중국 자전에 ‘찢을 육’(戮)과 의미가 통하는 점에 착안, 일제강점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찢어버리겠다는 뜻에서 ‘육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의 조국 독립에 대한 뜻이 얼마나 강건했던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육사는 투사와 저항의 시인만이 아니었다. 각별한 가족애, 부모에 대한 효도, 의로운 삶을 통해 사람다움의 도리를 실천하며, 비록 빼앗긴 조국이지만 정의가 살아있도록 노력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육사는 외동딸 이름조차 ‘나라를 잃고 모두가 궁핍한 시대에 일신의 평안을 바라며 혼자만의 기름진 삶을 살지 말라’는 뜻으로 옥비((沃非)라 지을 정도였다. 애국심에 불타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나라와 지역을 구한다며 나서고 있는 요즘, 결코 길지 않았던, 그러나 분명한 울림이 있었던 육사의 삶이 유난히 기억난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