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20여년 동안 세계의 중앙은행들은 대체로 두 자릿수의 과도한 물가상승을 물리치는 데 노력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성공적으로 기여해 왔다. 당연히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경험과 노하우가 많이 축적됐다. 경기가 둔화되면 금리 인하를 통해 경제가 퇴보하지 않도록 뒷받침했다. 금리인하의 과정에서도 중앙은행이 늘 인플레이션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건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2008년 말에 미국 등 선진국에서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중앙은행에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제로에 가까운 저금리가 수년간 지속되었음에도 불구, 인플레이션이 아닌 디플레이션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 그것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은 전통적 수단인 금리를 0%까지 내리고도 모자라 대규모 국채매입은 물론, 비전통적으로 민간채권까지 사들이면서 돈을 푸는 소위 양적 완화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미국이 성장률과 실업률의 개선에 힘입어 통화정책의 완화 정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옐런 신임 연준 총재의 취임 후 첫 번째 언론과의 대담도 온건한 비둘기와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유로지역은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 보인다. 유로지역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 더 과감한 양적완화에 나서야 한다고 훈수하는 IMF 총재와 이에 반대하는 유럽중앙은행 총재간의 신경전이 주목을 끌었다. 그렇지만 연준은 아직도 2~3년은 현재의 금리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고하고 있고,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디플레이션을 막으려는 수단으로 마이너스 금리까지도 만지작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설사 금리가 지금의 초 저수준에서 벗어나더라도 금융위기 이전의 수준까지는 가지 못할 것으로 시장은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비정상적인 초저금리 및 비전통적 양적완화 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 중앙은행을 초조하게 하고 있다. 특히 제일 큰 문제는 현재의 중앙은행 정책금리에 정책재량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경기둔화에 대비하려면 곳간을 미리 채워놓아야 하는데 현재의 제로 금리가 이어진다면 미래의 경제충격에 대비한 쿠션이 전혀 없다. 다시 말해서 금리를 더 이상 내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미 연준의 정책금리는 2008년 리먼사태가 발생했을 때 5%였다. 그 전 1990대 초 침체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정책금리가 8%였다. 다음은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로 매입해 보유하고 있는 대규모 채권에 대한 문제다. 미 연준은 2조3천억 달러의 만기 10년 이상의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앞으로 경제가 금융위기를 극복한다면 이 국채를 내다팔고 위기 이전의 대차대조표 규모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미 연준은 겉으로는 어떠한 계획이나 언급이 없다. 다만 연준이 작년말 국채 매입 규모를 조금 줄이겠다는 소위 테이퍼링을 시사했을 때, 금리가 1%p나 급상승했던 점을 고려하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연준은 금융위기 이전의 대차대조표 규모 수준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늘어난 유동성의 많은 부분을 금융시스템 안에 영구히 남겨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중앙은행이 정부지출을 돈을 찍어 보전하는 ‘화폐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선진국 중앙은행이 절대 금기시해왔다는 점에 이들의 고민이 있다. 또 이는 법으로 금지돼 있기도 하다. 물론, 양적 완화가 없었다면 경기침체와 대량 실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반론에 대응하기가 마땅치 않기는 하다. 하지만 돈을 찍는 결정은 재정과 달리 국회의 심의나 동의를 거치지 않는 너무나 간편하면서도 비민주적인 결정이다. 대규모 화폐화는 바이마르 독일의 역사적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 또 부자한테서 세금을 더 많이 걷어 지출하는 재정활동과는 달리 중앙은행의 화폐화는 부자들이 대부분 보유하고 있는 자산가격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아 경제적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단계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0년 또는 20년 후에도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그들의 대차대조표를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의 정상상태로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초조함이 이들을 고민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