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는 도로와 인도 사이에 인도보다는 살짝 높고 차도보다는 한참 높은 폭이 좁은 경계벽돌을 설치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 경계벽돌 위를 밟고 안 떨어지려고 양팔로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놀이를 한다. 도로도 아니고 인도도 아닌 경계선상에서 서로 누가 안 떨어지고 멀리 걸어갈 수 있는지 내기를 하곤 한다. 혼자 걸어갈 때도 그런 놀이를 하면서 간다. 독일어로 아이(kind)는 남성(der)도 아니고 여성(die)도 아닌 중성(das)을 관사로 사용한다. 어린이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선상에 있는 셈이다. 오래 전, 영국에서 생활할 때 엄마와 인도를 같이 걷던 유치원 아이가 양팔을 벌리고 뒤뚱거리면서 경계 벽돌 위를 걷는 모습을 뒤에서 본 적이 있다. 아이가 경계벽돌 위를 걷는 동안 엄마는 하지 말라고 말리지 않았고 아이가 균형을 못 잡고 한 쪽 발이 인도에 닿을 때도 그냥 두었다. 그러나 한쪽 발이 차도에 닿는 순간 엄마가 아이의 손등을 세차게 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혼을 낼 거라면 엄마는 처음부터 아이가 벽돌 위를 걷지 못하도록 할 것이지 왜 저럴까 생각했다. 경계벽돌 위를 걷는 것은 불법까지는 아닐지라도 벽돌이 어린이의 몸무게 정도는 버틸 수 있고, 그것이 자식에게는 놀이이며 즐거움이기에 엄마는 방관하는 듯했다. 그러나 차도에 발이 닿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차도에 발이 닿는 순간 혼을 내준 것은 최소한 안전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이었고 그러한 교육을 자식에게 해야 할 엄마의 의무였을 것이며, 아이는 차도에 발을 디딘 것에 대한 책임이었다.
이렇게 양육된 어린이가 후에 그 나라의 안전을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대중식당에서 펄펄 끓는 냄비를 중앙에 두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뛰어다니며 노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손님들은 불안하기 그지없어 못하게 말리면 아이 부모는 역성을 낸다. 내 자식을 왜 당신이 나무라며 왜 내 자식 기를 죽이느냐는 것이다. 이보다 조금 나을 것도 없는 어떤 부모는 천방지축 뛰며 돌아다니는 아이를 붙잡아 훈육할 생각은 고사하고, 끓는 냄비의 위험조차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얘야 손님들 식사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라고 앉은 그 자리에서 아이한테 눈길조차 돌리지 않으면서 혼잣말 하듯 한다. 아이들은 세상천지가 제 세상이며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한다. 그 아이가 후에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고 안전을 담당하는 것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에 이어 서울지하철 사건이 또 터졌다. 국가는 비행기를 포함하여 모든 영역에 안전점검을 하겠다고 나섰다. 안전에 대한 의식 없이 성장한 사람들이 처리하는 안전행정과 그 실행에 대한 결과는 오직 정부에서 제공한 안전 체크표에 체크하는 것밖에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싶다.
선진국 국민들은 은퇴 후 취미생활을 한다. 그 취미생활이란 독서, 음악 감상 같이 은퇴 전에도 일상으로 해오던 생활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해군경력이 있다면 그 특기를 살려 생활하고 있는 지역에서 해양구조대원으로 활약하는 것이 곧 취미생활이다. 이러한 취미생활이 공공서비스로 고양되어 모든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린이들은 경찰관 소방관 직업을 선호하고 실제로 국민들로부터 이러한 직업이 신뢰를 받는다. 우리는 자신의 취미와 특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취미와 특기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곳에 무언가라도 적어 넣어야만 했다. 특기를 취미로 하여 사회에 봉사할 마음을 갖기도 전에, 내 특기가 무엇인지 취미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개발하여 거기에 흥미를 붙일 틈새 없이 한 가지 입시준비에만 매달려 왔다.
현대사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전공과 직업이 있고 과거에 찬란했던 직업이 사멸해 가고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것을 일생 직업을 삼아 은퇴한 후 또 이것을 살려 사회를 위해 무엇으로 봉사를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전무한 것이 교육의 현주소이기도이기도 하다. 직업과 특기, 특기와 취미, 취미와 봉사의 경계는 없을수록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