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다는 표현, 그대로인 오월 하늘입니다. 며칠 전부터 회사 앞 동산에 꽃이 지천이던 생각에 화들짝 놀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찾아갔습니다. 오호통재(嗚呼痛哉), 말 그대로였습니다. 연분홍 또는 순백의 철쭉이 누렇게 바랜 채 고개를 숙이고 주검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목련은 이미 진 지 오래였구요. 참담한 마음에 풀밭에 주저 앉아 망연히 하늘을 보는데, 이 시 구절이 지나갑니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어디 목련뿐이랴/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눈부신 흰 빛으로 다시 피어/살아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우리들 오월의 꽃이/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한낱 목련이 진들/무에 그리 슬프랴.’
1988년 전남대가 주최한 ‘5월 문학상’ 수상작가인 박용주 시인의 ‘목련이 진들’입니다. 당시 나이 만 15세, 중학생이었습니다. 지는 목련을 보면서 수많은 죽음과 부활을 마치 수채화처럼 담담하게, 그러나 비장하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시를 쓰기 몇 해 전 그 마을에서 있었던 ‘끔찍한 죽임’을 꿈에서 생생하게 본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푸른 오월 하늘 사이로 청소년 눈에 비친 죽음을 노래한 시가 지나간 까닭을 스스로 묻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신 그 일 때문이겠지요. 잔인하고 참혹한 4월의 그 참사 말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악한 진실이 허물벗는 뱀처럼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또 해외에서 아연실색한 쓰나미가 일고 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잊고 수습하자고. 빨리 덮고 싶을 겝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선행돼야 할 것이 분명히 있겠지요. 그대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 말입니다.
지난 밤 SNS로 보내온 친구의 글로 마음을 나눕니다.
‘무엇이 있어/너를 위로하랴/꽃같은 세월,/장대비에 쓸려간/목련꽃보다 빨리 진/주검 앞에서/나는 무기력만 쏟아낸다/용서하지 마라/잊지도 마라/그 누가 있어/네게 사죄하랴/죽음의 문턱에서도/희망을 가르쳐준/어린 스승들아.’
/최정용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