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을 하여도 대접받지 못하는 노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한자가 ‘화’를 의미하는 노(怒)라고 한다. 종을 이르는 노(奴)와 마음(心)이 합쳐졌으니 분(忿·성질)이 나지 않았겠는가. ‘화내는 것’을 다른 말로 분노(憤怒·忿怒)라고도 하는 이유다. ‘화나다’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부아가 나다’라는 말이 있다. 부아란 순수 우리말로 허파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옳지 못하다고 느꼈을 때 분노한다. 때문에 분노 표출은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는 매우 정당한 행위라고 믿곤 한다. 사람들이 분노를 표출한 이후에 감정적으로 후련함을 느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할 일을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 속 분노를 모두 분출하면 신경증이 좋아진다고 하여 한때 ‘카타르시스 치료법’이 ‘화’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상사 목조르기(Choking Strangler Boss)’라는 장난감이 직장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사람모양 인형인 이 장난감은 왼손을 누르면 ‘아파도 야근을 해야 해!’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목을 조르면 두 눈이 튀어나오고 팔 다리를 허우적대면서 ‘당신의 봉급은 인상되어야 합니다’ ‘휴가 가십시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직장인 분노 표출의 카타르시스를 도와주는 장난감의 일종이다.
이처럼 분노, 즉 화는 분출시키는 것이 좋다고 한다. 따라서 큰 소리로 항의하거나 법적으로 소송하는 행동 역시 자연스런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해로운 화를 참기보다는 ‘샌드백을 치거나 실내 야구장에서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라’ ‘산에 가서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내뱉어라’고 충고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라는 것이다.
은근과 끈기, 인내심 등이 전통으로 간주되고 특히 선비의 덕을 숭상한 유교의 영향인지 우리는 아무렇게나 화를 내는 것을 아주 천한 행동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한(恨)을 품는 데 익숙해서 그런가. 우울증의 일종인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이 우리에겐 유독 많다. 요즘은 더하다. 직장, 사회, 정치판, 여기저기 널려 있다. 부아가 나고 울화가 터질 지경이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