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後漢)의 순제(順帝) 때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조금 특이한 인물이었다. 학문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벼슬에 대한 욕심도 전혀 없었다. 왕이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등용하려고 해도 병을 핑계로 끝까지 출사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사람의 한평생이 결코 길지 않은데, 무엇하러 그 악다구니 속에 들어가 부대끼고 귀를 더럽히며 아까운 세월을 허비한단 말인가”라며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특이한 삶을 살고 있는 그의 주변엔 오히려 수백명의 제자가 모여들었고 당대에 유명한 학자들까지도 그를 만나보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장해는 이것마저 귀찮게 여겼고 급기야 화음산(華陰山) 밑에 있는 고향으로 낙향을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 벽촌까지 기를 쓰고 찾아가는 바람에 집은 항상 잔칫날 같았고, 그의 자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길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관서사람 배우(裴優)처럼 그의 도술을 배우려는 무리도 많았다. 사방 3리까지 안개를 만들 줄 알던 배우가 장해의 5리까지 안개를 피우는 도술을 배우겠다며 끈질기게 제자 되길 청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장해는 ‘오리안개’를 피워놓은 채 화음산 속으로 잠적해버렸다. 오리무(五里霧), 즉 5리의 안개라는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은 이처럼 처음에는 오리무였으나, 5리나 되는 안개 속에 길을 잃으면 방향을 전혀 분간할 수 없다는 데서 훗날 ‘가운데 중(中)’이 붙은 것이다.
안개 속에 갇히면 동서남북은 물론 한치 앞도 구분 못한다. 따라서 어떤 일의 형국에 대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오리무중이란 표현을 쓴다. 이럴 땐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무언가를 찾듯이 암중모색(暗中摸索)이라도 해야 한다. 어림짐작으로 무엇인가를 알아내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때문이다.
장해도 아닌데 유병언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안성 금수산을 수색했으나 유병언 체포에 실패한 검찰은 암중모색하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나아갈 방향을 종잡지 못하고 있다. 마치 다기망양(多岐亡羊), 즉 여러 갈래 길 앞에서 양을 잃어버린 형국이다. 안타깝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