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연극반 시절이었다. 시골 촌놈이 서울 신촌의 산울림 소극장에서 연극 한 편을 만난다. 부조리극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다. 연극이 끝난 후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혼란과 혼돈, 그리고 놀라움 때문이었다.
전무송과 주호성, 김성옥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을 코 앞에서 봤던 것이 그 하나요. 오지 않을 ‘그 무엇(et was)’을 기다리는 주인공을 통해 인생을 반추해 내는 무미건조했던 대본이 그 둘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무엇을 할 것인가’를 화두(話頭)로 이고 살던 ‘안개의 생(生)’이 조금은 밝아진 것이 그 셋이다.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다.’ 연극은 끊임없이 이 한 주제로 관객들의 뇌리에 못을 쳤다.
부조리극(Absurdes Theater)은 그런 것이다. 불합리 속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소통의 부재를 드러내 인간에게 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해답은 관객의 몫으로 어지러이 던져 놓는다.
그렇다면 부조리한 세상은 어떨까.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인간이나 세계는 부조리한 상태에 있고 부조리한 상황을 만든다. 질투, 야심, 방종 등이다. 하여 인간은 무의미, 무목적적인 생활로 운명지워진다.’ 다분히 염세적이다. 그러나 반전은 마지막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반항적 인간(l’homme revolte)으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조리한 세상이 결국 반항적인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고도…’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그들은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을 것은 없다’를 역설한 것은 아닐까. 오지 않을 것은 없다. 다만 ‘오지 않기를 바라’거나 ‘숨기고 싶은’ 세력만 있는 것이다, 뭐 이렇게.
요즘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바라거나 숨기고 싶은’ 이들에게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한 구절을 빌려 한마디 드린다.
‘…/다시 문이 닫힌다/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이것이 일상이다.
/최정용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