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하면 정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776년 등극하자마자 각종 적폐와 기득권 세력 혁파를 위해 규장각을 제일 먼저 설치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당쟁의 혼란 속에 아버지 장헌세자를 잃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주위엔 오랜 기간 권력의 단맛에 젖은 무리들뿐이었다. 이들은 갖은 계략으로 정조의 신변을 위협하고 회유와 유혹의 손길을 보내왔다. 특히 정사에 일일이 간섭하며 조정을 농단하는 내척과 외척 세력들의 기세는 도를 넘을 지경이었다. 정조는 이러한 혼란의 조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첫 번째 조치로 규장각이라는 혁신기구를 설치한 것이다.
사실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에서 출발시켰다. 그리고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역대의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의 중심기관 역할을 맡도록 했다. 그러나 설치 초기 정조의 더 큰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자신의 혁신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정치기관으로 키우려 한 게 그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추진했다. 정조가 이를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인재 등용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그러자 규장각에는 인재가 모여들었다. 정조는 이들 중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젊고 참신한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기용했는가 하면 숙종 이래 실각한 남인도 등용했다. 또 남북·노소론의 당파에 구애 없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개혁적인 지식인도 중용했다. 이는 ‘옛 법을 본받아 새것을 창출한다’는 규장각 설립 취지에 가장 부합되는 일이기도 했다.
정조 원년에 규장각 대제학이 되고 수원성 축성의 총책임을 맡았던 채제공과 역시 수원성 축성에 과학기술을 도입했던 정약용은 남인이었으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박지원·박제가 등은 노론계 실학자였다. 정조는 이들을 두루 등용하는 데도 서슴지 않았다. 정조가 형정(刑政) 개혁, 천세력 제정, 노비추쇄법 폐지 등 수많은 치적을 남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정조는 자신의 집무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당시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정파를 초월한 정조의 혁신적 인사정책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혁신’을 외치며 ‘인수위’ 대신 ‘혁신위’를 꾸린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인이 새겨볼 역사는 아닌지.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