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7일 파주에 있는 장준하 공원에서 고 장준하 선생님(1918~1975)의 39주기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비가 왔지만 많은 분들이 추모의 마음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39년 전의 의문사가 타살로 확인될 때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고, 진상을 규명하려던 유족과 동지들이 큰 고통을 당했지만, 선생님이 꿈꾸었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소개가 필요 없는 분이지만 장준하 선생님은 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1942년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지만 학도병에 자원입대, 탈출과 대장정, 독립운동, 해방정국을 거치면서 못 마친 신학공부를 1949년에 한신대학교에서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교역의 길을 걷지 않으셨습니다. 비운의 짧은 삶(57세 소천)을 사셨지만 그 분의 삶은 신학과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가둘 수 없을 만큼 크고, 그 분이 사셨던 시대보다 더 웅대합니다.
자서전,해방 후 2년간 기록
‘돌베개’, 그 분이 쓰신 자서전의 제목입니다. 중원 땅 6천리 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목숨을 건 대장정에서 해방을 맞은 2년 동안의 삶의 기록입니다. ‘돌베개’의 곳곳에서 우리는 선생님의 절규를 듣습니다. 광막한 중원 대륙 수수밭 속에 누워 침 없이 마른입으로 몇 번이고 되씹었던 말, 눈 덩어리를 베개로 하고 동사의 기로에서 밤을 지새우며 한없이 울부짖었던 이 말,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못난 조상에 대한 한스러움과 다시는 후손에게 욕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였습니다.
그러나 6천리 길, 사투 끝에 도착한 충칭의 임시정부는 선생님이 생각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임정은 물론, 몇 명 되지도 않는 교민사회도 사분오열되어 있었습니다. 임정 건물 위에 펄럭이던 태극기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격도 잠시, 선생님은 교포들이 모인 주간회의 석상에서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자원, 이 임시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서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 분명히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들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 이를 악물고 헤매어 온 것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이것으로 저의 말을 맺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임정이, 교포 사회가 술렁거렸습니다. 정치현실을 모르는 당돌한 한 청년의 돌출행위라고 치부하기엔 분열은 현실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남북과 동서로 분열된 것도 모자라,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양극화 되어 있습니다. 만일 장준하 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면 어딘가를 이미 폭격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내년이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 그리고 해방 70년이 됩니다. 통일이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된 민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자주·자립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독립된 민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민족의 동량 되겠다 결의 실천
장준하 선생님은 우리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통일 한반도, 아시아의 평화와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하는 나라 만들어, 후손들로부터 못난 조상이라는 비난 듣지 말라는 말씀이겠지요.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는 길, 우리의 무능과 태만과 비겁으로 말미암아 자손만대에 누(累)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는 길’, 그것은 우리가 ‘유신창업의 기백과 실천을 다짐하고,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하고, 대를 위해 소를 버리겠다고 결심하며, 지중한 시기에 현재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민족의 동량이 되겠다고 결의’하고 실천에 나서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