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여러 개의 기업을 거느리며 막강한 재력과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기업가의 무리’라는 사전적 의미 외에도 국민들에게 여러가지 감정을 가지게 한다. 그것은 재벌은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창업주 재벌 1세는 한국동란 이후 폐허 속에서 기업을 일궈냈고, 재벌 2세는 그 기업을 이어받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소위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2, 3세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은 한 마디로 싸늘하기만 하다.
2007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둘째 아들이 술집 종업원에게 맞았다는 이유로 김승연 회장이 경호원을 동행한 채 청계산에서 보복 폭행을 한 적이 있다. 2010년에는 SK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이 맷값이라고 2천만원을 건낸 사건이 일어났었다. ‘땅콩회항’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남동생 조원태 부사장도 2005년 70대 할머니에게 폭언과 폭행을 해 경찰에 입건된 적이 있다. 조현아 전 부사장도 작년 소위 ‘하와이 원정출산’으로 이를 비난한 네티즌 3명을 고소했었다.
온라인상에서 조현아 전 부사장을 비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 중에 하나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이다. 영국 속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his mouth)’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19년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의 ‘돈키호테’ 영문 번역본이다. 은수저란 ‘부와 명예는 물론, 아름다움과 건강을 물려받고 태어났다’란 의미를 가지는데 거기에 가장 합당한 재벌 3세 중 한 명이 바로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다.
조현아 전 부사장에게서 ‘재벌 3세’란 타이틀을 떼내도 여전히 최고의 스펙을 자랑한다. 미 명문 코넬대 호텔경영학 학사와 173cm의 훤칠한 키에 고현정을 연상시키는 수려한 외모는 모든 이의 부러움을 자아낼 만하다. 즉 남녀노소 모두에게 ‘비호감’을 비출만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었다. 완벽하게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조현아 전 부사장이 갖추어야할, 아니면 대중에게 보여 줘야 할 이미지는 ‘겸손’이었다. 하지만 조 전 부사장의 키워드는 ‘자신감’, ‘거만함’, ‘원정출산’, ‘고소’, ‘은수저’와 같은 부정적인 온라인 평판이 주를 이뤘다.
온라인 평판 관리에서 자장 중요한 것이 평소에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대한항공과 조현아 전 부사장은 자신들의 부정적인 ‘온라인 평판’을 간과한 것이 오늘날 이처럼 화를 키운 것이다.
지난 5일 발생한 ‘땅콩회항’은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여지가 분명 존재한다. 대한항공이나 조현아 전 부사장이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의 여지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거의 전 언론과 누리꾼들이 연일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한항공과 조 전 부사장이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기업 위기관리 전문가는 이런 경우를 ‘마녀사냥’이라고 본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부적절한 행위와 대한항공의 어이없는 위기관리 시스템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조현아 전 부사장에 대한 대중의 ‘비호감’이 사건 자체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괜히 싫다’가 ‘땅콩회항’ 사태를 추동하는 가장 큰 요소인 것이다. 그야말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마녀사냥이 현재 진행 중이다.
작년에 있었던 ‘남양유업 사태’는 주가가 최고점 대비 거의 반토막이 나고, 회사 대표와 회장이 기소되는 비극으로 끝났다. 남양유업 사태는 한 영업사원의 욕설과 제품 밀어내기와 같은 기업 행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은 기업 행태에 ‘은수저를 문’ 조현아 전 부사장에 대한 비호감이 더해져 대한항공의 항로에 더욱 짙은 안개가 낀 것이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태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악화되고 있고, 대한항공과 조양호 회장, 조현아 전 부사장에게 남양유업보다 더 혹독한 대가가 따를 가능성이 크다.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은 15일 임원회의에서 “이번에 회사의 위기대응 시스템이 문제가 있었으며, 선제적 위기관리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집에 불이 났는데 소방시설을 구축한다는 말과 다름 없다. 지금은 더 늦기 전에 빨리 불을 꺼야 하는 시기이다. 입에 물었던 ‘은수저’를 내려놓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