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에도 맛이 있다. 똑같은 무예를 수련한다 하더라도 어느 선생님께 배우냐에 따라 수련의 궁극적 지점과 실제 움직임이 달라지게 된다. 여기에 수련자의 품성 또한 무예의 맛을 변화시킨다. 성질이 급하고 저돌적인 사람이라면 무예에서도 그 조급한 마음의 색깔이 그대로 묻어나오게 된다. 그래서 한 선생님께 배웠을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에서 몸으로 전수되는 무예도 저마다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무예를 배우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마다 자신만의 맛을 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더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속도를 추구하고 다른이는 파괴력에 주안점을 두고 무예 수련의 내용을 변화시킨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무예라는 것은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기본기다. 제대로 권을 지르거나 발을 들어 올려 차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검술이라면 반듯하게 머리 위로 칼을 들었다가 한번 크게 내려 베는 기법이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기 수련을 바탕으로 연속 동작을 수련하여 가상의 공방을 이어내는 것이 형 혹은 투로가 되는 것이다.
지나친 속도나 파괴력을 얻기 위하여 변형된 수련은 기본기까지도 변화시킨다. 특히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시범을 위한 자세에서는 화려한 기술까지 더해지면서 기본기는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몸 움직임이 만들어지게 된다. 자신이 무예의 새로운 맛을 더하려고 추가한 것들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기본기는 이미 몸에 익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세는 변화해 버린다.
이는 마치 요리에서 원재료의 맛과 질감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온갖 부수적인 첨가물들을 넣는 것과 같다. 원재료가 갖는 담백한 맛은 뒤로하고 특정한 맛을 내기 위하여 수많은 양념들이 더해지면서 그 요리의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의도적으로 감칠맛을 내기 위하여 화학조미료까지 더해지면 처음에는 그 맛에 새로움을 느낄 수 있을지라도 종국에는 라면스프 맛에 가까운 인스턴트 요리가 될 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들었던 문장 중 대학(大學)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경구가 있다. 바로 자신의 몸을 닦아야 집안을 가지런하게 단속할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무예수련으로 보자면 자신의 몸을 이해하면서 기본기 수련을 안정시키는 것이 ‘수신(修身)’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약 수신에 힘을 쓰지 않는다면 모든 일들이 한낱 모래성에 불과할 뿐이다.
대학의 원문을 보면 이러한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문장은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후 즉근도의)’인데, 해석을 해보면 ‘만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하고(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善治其國 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 선치기국), 그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한다(欲治其國者 先齊其家 욕치기국자 선제기가). 그리고 그 집안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지신의 수양을 해야 하고(欲齊其家者 先修其身 욕제기가자 선수기신), 자기 자신의 수양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欲修其身者 先正其心 욕수기신자 선정기심)라고 하였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근본과 순서가 있고, 그 시작을 두텁게 쌓아야만 큰 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로지 수신에만 몰두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에 망설일 필요는 없다. 내 몸을 쉼 없이 다스리며 제가나 치국을 넘어 평천하의 길을 가면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미 평천하했다고 하여 내 몸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무예 수련처럼 자신의 근본인 기본기마저 흔들려 버린다. 그래서 고수라 불리는 무예인들이 화려한 자세에 신경 쓰기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한 수련을 계속하는 것이다. 담백한 무예의 맛은 기본에 있으며, 진솔한 삶의 맛 역시 일상 생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