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히 높지 않은 산들이 울타리처럼 빼곡히 둘러앉은 지형이 위에서 보면 흡사 삼태를 닮았다고 하는 산골 마을, 큰 부자가 나올 리도 없겠지만 돈을 한 삼태만 벌면 떠나야 하는 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농토라고 해 봐야 그다지 넓지도 않았고 그것도 없는 사람들은 산 비알을 일구며 작물을 기르기도 했다. 따라서 평야지대와는 재배되는 농작물의 종류나 규모 또한 단순했다. 그 밖의 채소도 집에서 먹을 만큼 심었다. 오래 전이기도 했지만 수도권이라고는 해도 근교 농업이나 목축을 하는 집도 없이 근근이 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여러 자식을 기르며 교육을 시켰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설을 쇠고 며칠이 지나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외가댁 즉 할머니의 친정이나 큰 고모님께 세배도 드리고 층층시하에서 살얼음판 같은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막내 동생을 찾아보러 떠나셨다. 아버지께서 집을 비우시는 일은 거의 없어서 하룻밤을 지내고 우리 남매는 동네를 드나드는 큰 길이 보이는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놀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북서풍이 매서운 해질녘에 잿빛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좁다란 마을 안길로 접어드시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갔다. 저녁상을 물리고 큰고모님 댁 소식과 딸 같은 막내 동생 소식을 전하시며 몇 차례씩 말씀이 끊기는 이유도 그 때는 알 길이 없었고 오로지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던 꾸러미에 대한 궁금증이 그 꾸러미 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몇 개비의 담배를 피우시고도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의 무거운 표정에 귓속말로 엄마를 졸랐다. 그제야 아버지께서는 잠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으시고 따뜻한 얼굴로 돌아오셨다. 고모님들이 우리들에게 학교 잘 다니고 밥 잘 먹으라고 했다고 전하시며 꾸러미를 풀어 보이셨다. 동여맨 노끈을 풀고 몇 번을 싸고 싼 종이를 풀어보니 그 속에는 연한 자줏빛 땅콩이 가득 들어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 동시에 밖으로 나갈 사이도 없이 방문을 열고 퉤퉤 하는 소리와 함께 뱉어버렸다. 평소에 먹던 땅콩의 고소한 맛은 간 데 없고 비릿한 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볶지 않아 비린내가 나는 날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무턱대고 입에 넣었으니 비린내가 고약했다. 다음 날 우리는 고소하게 볶은 땅콩을 먹었고 그 해 봄 우리 동네에서 처음으로 땅콩을 심었다. 그리고 딸네 집에서 가지고 온 종자는 밑지지 말고 잘 길러야 딸이 잘 살게 된다고 하시며 정성을 쏟으셨다.
요즘 방송이나 신문에 땅콩회항 사건이 시끄럽다 못해 귀가 따갑다. 그 항공사 사주의 딸은 속칭 갑질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급기야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게 되었다. 타인의 노력과 시간에 대한 경멸을 넘어 인격참살이라고 해야 마땅할, 꿇리는 사람과 꿇는 사람의 명백한 대조와 구분에서 언제쯤이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미국의 40대 대통령으로 당선 된 지미 카터를 소개하면서 조지아 출신 땅콩장수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우리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대통령 당선 소식에 우리는 출렁거렸다.
그 시절 얘기로 서울역 땅콩장수의 어깨가 1인치 이상 올라갔다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였다. 이제 보니 땅콩이라고 다 같은 맛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