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은 “20세기가 전문가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통합의 시대라고 했다. 21세기 통합의 시대에는 어느 것 하나만 잘해가지고는 살아남기 어렵게 되어 있다. 앞으로 지식사회를 선도해갈 인재들은 지금까지 전문가들이 간과한 지식 대통합을 통해 분야를 넘나드는 창조적 사고를 반드시 익혀야 한다”고 했다. 창조적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느낌과 감정과 직관의 사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오늘의 절대적인 명령과 같이 됐다. 얼마 전 서점에 들렀다가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라는 책을 보았다.
거기에는 서울대에서 최우등생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 중 하나는 교수가 강의 중에 한 말을 최대한 그대로 받아쓰고, 그것을 시험지에,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학점을 잘 받는 첩경이라고 했다. 영국에서도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캠브리지나 다른 대학에서 시험이란 극한적인 경쟁을 유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험성적이 개인의 명예와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험은 주로 ‘암기와 빠른 구두답변’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학생들은 시험지에 교수의 강의내용을 최대한 옮겨놓지 않으면 안 됐다. 20세기 전문가 시대에는 모든 분야를 쪼개고 나누어 칸을 만들어 분리하고 차단시켜, 교육체계도 그에 따라 분리된 과목과 그 과목에 따른 공식 언어체계에만 기반을 두도록 했다.
따라서 교육자들은 학생들에게 수사적이고 통사론적 논리를 가르치면서도 그와 연결시켜야 하는 느낌과 직관의 초 논리는 아애 무시하고 배제했다. 학생들은 그 과목의 말과 숫자를 통해 배우고, 평가받아왔으며, 또 그것을 통해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을 불변의 전제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20세기에는 편협한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에만 치중했다.
당시 영국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가 대학에 보내주지 않았을 때, 하루하루를 좌절감 속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대학을 가지 못했기 때문에 정규교육에 얽매이지 않고 독학을 했던 것이 오히려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경험과 독학으로 얻은 그녀의 모든 학습경험은 아인슈타인처럼 정규교육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녀는 문학의 ‘무엇’뿐만 아니라 ‘어떻게’를 터득할 수 있었다. 당시 정규교육에서는 문학에서의 ‘무엇’만 강조했지, 즉 문학의 내용 중에 ‘무엇이 비평과 평가의 대상이 되느냐’만 강조하고 가르쳤지, 그것이 ‘어떻게’ 구성됐느냐에 대한 원인은 무시했다.
그 결과 학교교육은 상상력을 키워주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과 몸, 지성과 직관을 연결하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다. 학교교육으로는 교육에서, ‘사실’인 ‘무엇’은 습득할 수 있지만, 그 사실에 대한 의미, 즉 ‘어떻게’는 상상할 수가 없게 하고 있었다.
당시의 학교 교육에서는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그리고 ‘환상’과 ‘실제’를 분리시키는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학생들의 총명한 머리를 한쪽만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상상할 수 없으면, 창조할 수도 없다, 즉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가 없다.
즉 자신이 습득한 지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지식의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즉 지식의 세계에서 지혜의 세계로 뛰어넘지 못한다. 환상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춘 마음의 눈을 계발하지 못한다면, 육체의 눈, 즉 지식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자연적 현상이나 문학, 예술작품 등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에게 실제가 될 수 없다. 그것들로부터 우리가 ‘이해’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빌어 우리가 이해하도록 해석해야만 한다. 창조적 사고는 내적 상상과 외적 경험이 일치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교육에서 ‘무엇’과 ‘어떻게’를 분리시키는 것은, 곧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이 분리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학생들은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앎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암기함으로써 알게 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떻게’ 응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할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