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는 몸에서 몸으로 전하는 몸문화의 요체다. 따라서 그 특성상 단순히 말과 글로만 익힐 수가 없다. 그래서 무예에서는 구전심수(口傳心授)라 하여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말로 전해주고 온 마음을 담아 가르쳐줘야만 그 진정한 의미를 익힐 수 있다.
주먹을 지르고, 발차기를 한번 뻗어 올리더라도 그 상황에 따라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바로 상대의 반격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예에서 스승은 다른 영역에서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귀한 가르침의 과정에서 스승 또한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된다. 제 아무리 무예의 고수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생물이기에 예전에 배웠던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움직임을 가르침의 과정에서 얻을 수도 있다. 제자들의 실력이 기본기를 넘을 수 없다면 스승 역시 가르침의 과정에서 그 한계를 벋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배움의 관계성을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사자성어로 표현하곤 한다. 스승과 제자는 한쪽은 일방적으로 가르치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영원히 배우기만 하는 주종관계나 상하관계가 아니라 스승은 좋은 제자를 만나 다양한 가르침으로써 성장하고 제자 역시 배움으로써 발전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가르침은 일정한 방향이 있으나, 그 깨우침은 상호간에 일어나는 법이다. 만약 이런 상호작용이 없다면 더 이상 스승은 스승으로 남아 있을 수 없고, 제자 역시 그 스승을 떠나 더 좋은 스승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유가의 경전 중 오경(五經)의 하나로,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三禮) 중 하나로 꼽히는『예기(禮記)』에 이러한 부분이 잘 담겨 있다. 그 책의 한 장인 학기편(學記篇)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비록 좋은 안주가 있더라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雖有佳肴(수유가효)라도 弗食(불식)하면 不知其味也(부지기미야)요>, 비록 지극한 도가 있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그 좋음을 모른다<雖有至道(수유지도)나 弗學(불학)하면 不知其善也(부지기선야)니라>.” 말 그대로 고기는 씹어 봐야 맛을 알고, 매는 맞아 봐야 아픔을 느낀다는 지극히 단순 명쾌한 이야기다. 거기에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 공부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따라서 배워 본 이후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是故(시고)로 學然後(학연후)에 知不足(지부족)하고>, 가르친 이후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敎然後(교연후)에 知困(지곤)하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부족함을 안 연후에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막힘을 안 연후에 스스로 힘쓸 수 있으니, 그러므로 “그러기에 가르치고 배우면 서로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교학상장)”라고 하였다.
배움의 길에 끝은 없다. 제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깨우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스승의 깨우침이나 가르침 또한 유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스승 또한 가르침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쉼 없이 공부하고 수련해야 한다. 몸공부든 마음공부든 공부는 흘러가는 강물에 노를 젓는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이 상당히 높아져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물살이 약해진 곳이라 할지라도 노젓는 행위를 멈추면 언젠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만약 스승이 자신의 부족한 곳을 더 채우고 풀어낸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더 깊은 배움을 얻어 스승을 뛰어 넘는 인재로 성장 할 수도 있다. 역시 제자들은 배우는 단계이기에 물살이 한 없이 센 곳을 쉼 없이 노을 저어야만 그 단계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런 쉼 없는 배움과 깨우침이 공존하기에 공부는 끝이 없는 것이다.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이유 없이 억압하거나 제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복종하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 ‘교학상장’ 의 마음이 다져질 때 비로소 공부는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