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 수련에서는 늘 빠름을 추구한다. 상대보다 먼저 생각해야하고, 먼저 움직여야만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데로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의 작은 눈빛의 변화나 어깨의 움직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움직임의 출발은 멈춤에 있다. 상대가 주먹을 한번 뻗어 내든지 혹은 칼을 한번 휘두른다 해도 그 시작은 멈춤에서 시작한다. 이를 시쳇말로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고요한 호숫가에 한가롭게 떠있는 고니의 모습 속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듯하지만, 물 위에 안정적으로 떠 있기 위하여 고니는 쉼 없이 자신의 발을 휘젖고 있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을 끊어 내듯 멈췄던 몸이 상대의 반응과 함께 움직일 때 그동안 수련했던 공격과 방어를 위한 모든 움직임들이 그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중동이라는 표현 안에는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부단히 움직임을 만드는 쉼 없는 수련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무예는 멈출 수 있을 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멈춤의 의미를 알 때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예 수련자들이 처음에 기본기를 몸으로 수련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주먹을 멈추고, 칼을 멈추는 법을 배우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초보수련자들이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언제 멈추고 언제 다시 움직이느냐를 배우는 것이다. 상대의 공격 흐름을 어디에서 멈추게 하고 나의 공격지점을 어디로 삼느냐를 쉼없이 몸과 몸을 통해 익히는 것이다. 자세는 크고 화려하지만 보여주기 식으로 흘러 버려 무예의 본질인 몸을 맞대는 상대와의 조화는 무시하고 오로지 눈빛으로 주고받는 관객과의 만남으로 종료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화법의 움직임은 자신의 몸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무예 수련에 맞게 멈추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쉼 없는 연마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연마의 과정 중 핵심은 멈추는 법이다. 그러한 수련의 반복과 깊이를 한자성어로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고도 한다.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의 첫 번째 공부과목인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등장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어느 날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가난하더라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으며[貧而無諂(빈이무첨)] 부자가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富而無驕(부이무교)]. 그건 어떤 사람일까요?” “좋긴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길 알고[貧而樂道(빈이악도)] 부자가 되더라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富而好禮(부이호례)].” 공자의 대답에 이어 자공은 또 이렇게 물었다. “『시경(詩經)』에 ‘선 명하고 아름다운 군자는 뼈나 상아(象牙)를 잘라서 줄로 간 것[切磋(절차)]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硏磨(연마)]처럼 밝게 빛나는 것 같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선생님이 말씀하긴 ‘수양에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일까요?”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賜:자공의 이름)야, 이제 너와 함께 『시경』을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과거의 것을 알려주면 미래의 것을 안다고 했듯이, 너야말로 하나를 듣고 둘을 알 수 있는 인물이구나.”
이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군자는 절차탁마를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쉼 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예와 도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풀어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무예에서도 자신의 수련을 즐길 수 있으려면 우선 현재의 상황인 ‘멈춤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멈춰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처럼 멈춰야 비로소 움직임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