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세 부친은 쓰러지신지 꼭 2주 만에 폐렴이 악화되어 별세하셨다. 장례기간 내내 날씨가 너무 추워서 조문객들은 몹시 불편하셨을 것이다. 송구스럽고 고마운 마음이 크다. 불효한 자식들은 부친의 별세에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호상이라고 했지만 그저 가족들 더 고생 안 시키시고 2주 만에 돌아가신 것을 자식들은 내심 기뻐하였다. 70여년 함께 사신 노모는 잠시 슬퍼하셨지만 입관 때 관 뚜껑을 닫는 순간 눈시울도 멈추셨다. 벽제에서는 곳곳에서 통곡소리가 울려퍼지는데 조카 딸 아이가 왜 저 사람들은 우느냐고 묻자 큰 조카가 사람마다 죽는 사연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별세하신 부친의 모든 가족들은 ‘쿨’하다 못해 ‘콜드’하였다. 삼우제 날도 가족들의 감정은 변함없었고 노모의 웃음은 옆 사람까지 들렸다. 점심식사 중에 맏형이 형제들에게 살아생전 부친에 대한 추념을 하자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를 말해 보라고 했을 때 그 어떤 형제들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했다. 정말 한 장면도 없었을까? 차라리 술주정으로 자식들을 괴롭히셨다면 그런 장면이라도 떠오를 텐데 자식들 중에 부친에 대한, 부친과 함께 했던 기억하고 기념할 만한 장면이 정말 한 컷도 없었다. 부친이 계셨지만 자식들은 아버지로서의 롤 모델을 학습할 기회 없이 아빠 엄마가 되어 자식들을 키웠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그 과거들이 모여서 그 사람의 인생이 되고 그 사람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만든다. 살아갈 날 수가 지나온 날 수보다 많다면 회심하고 개혁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정립하고 이미지도 바꿀 기회가 있겠지만 적어도 50살이 넘으면 그럴 기회는 줄어들고 더구나 이미지를 바꾸기란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자식들에게조차 물질은 고사하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기념할 만한 것조차 유산이나 유언을 남기지 못하시고 가족 곁을 떠나신 부친에 대한 자식들의 원망도 없었다. 분명히 아버지로 계셨지만 계시지 않았던 아버지, 재직 중에는 아내와 지식을 고생시키고, 은퇴하신 후에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셨던 아버지, 별세하신 후에 가족들에게 슬픔보다는 차라리 기쁨을 주신 아버지셨다. 마주대하기 싫어도 만지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었던 부친의 물질적인 육신은 영원히 가족 곁을 떠나셨다.
지금 당장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자식들은 계셔도 안 계셨던 부친이라는 큰 덩어리가 그리울 즈음 비로소 불효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살아생전 부친의 속내를 자식들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아버지들에 비해 설사 자식에 대한 기대와 사랑과 정이 적으셨을지라도 엉뚱하고 난폭한 부친을 두었거나 소실 부친 했던 자식들에 비하면 이것은 큰 행운이었으며 복이었다. 90세 홀로 남으신 노모에 대한 자식들의 공경은 분명히 남달라야 한다. 평생 사모님 호칭을 듣고 사셨지만 평범한 아줌마들보다도 더 마음고생 몸 고생하신 가여운 노모를 더 정성껏 모셔야 그나마 부친에 대한 불효를 조금이나마 상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딸이 시집 간지 10개월 만인 재작년에 우리 부부는 표현 할 수 없는 기막힌 사건으로 같은 서울에 살면서 딸 사위 부부와 생결별을 선언하고 지금껏 마음 아파하고 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딸애와 간접적으로 화해를 청했지만 딸애가 부모의 몸짓을 눈치 못 챈 것은 아니었을 텐데 실패하고 말았다. 자식이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알까? 부친이 별세하신 후에야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던 자식들의 불효막심함을 이제 자식으로부터 되돌려 받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애비로서 돌아가신 부친과는 다르게 딸한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내리사랑이라는 부모의 사랑을 악용하고 있는 요즘 젊은 자녀들이 있다면 그들도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그 자식들로부터 이 모든 것을 되돌려 받으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우둔한 자식들에게는 부모의 은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