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폭력 사건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갑의 횡포와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사는 가여운 을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를 갑과 을로 양분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는 부자와 빈자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도로 설명할 수도 없는 신뢰와 애정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이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풍조에서 보육의 수요자이며 대상인 어린이들이 그런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아이는 그 날의 공포가 두고두고 깊은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 운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갑을 능가하는 을의 횡포는 지도 감독의 눈을 피해 자라나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지는 사회문제가 되었다. 물론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며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대다수의 보육교사들까지 매도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엄마가 자기 자식을 품에서 키울 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척박해졌다. 아이를 친정이나 시댁에 맡겨 키우거나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는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일이 자연스런 과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게다가 무상보육이 전면 시행되면서 기저귀도 떼지 못한 아기들이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들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미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 시설이나 인원을 양산하고 그 과정에서 보육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결과 제도를 강화하고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제도의 문제도 없지 않겠지만 이는 정서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이야 엄마가 아이를 직접 기르는 일이겠지만 여성의 사회진출로 없는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거의 핵가족으로 살고 있으니 아이는 말도 다 배우기 전에 엄마와 떨어져 정서적인 유대 또한 희박하다. 출산 휴가뿐만 아니라 원하는 경우 직접 육아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모유 수유는 물론이고 아이를 베이비 침대가 아니라 품에 안고 재우고 아이의 분홍빛 잇몸에서 유치가 나온 모습이라도 찍어두고 걸음마를 떼면 손뼉 치며 칭찬해 주는, 적어도 아이가 서툴게나마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가족 구성원간의 사랑과 유대를 느낄 수 있을 할 정도만이라도 기른 후 사회에 복귀하는데 장애가 없다면 보육 시설이나 인원을 확충하는 일보다 더 절실할 수도 있다고 본다.
닷새 장이 서는 날이면 아이들을 꼬마 기차 같기도 하고 박스 같기도 한 것을 타고 선생님이 끌어주기도 하고 조금 큰 아이들은 손을 끈으로 연결해서 데리고 다니며 장날 체험 학습을 한다며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연출한다. 물론 그것도 교육이라고 하면 할 말을 없지만 복잡한 길에서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고 어른들은 아예 혀를 차기도 하신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애를 기르니 저렇다며…. 할머니들은 며느리가 아이 혼내는 모습에도 화가 나시고 손자 눈에서 눈물이 나면 며느리를 패고 싶다고까지 하신다. 이유인즉 내 생애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끔 하는 생각이지만 차제에 경로당과 어린이집을 같은 건물에 설치하면 어떨까? 핵가족 시대에 친손자손녀의 재롱을 보며 살지는 못해도 아이들도 어른에 대한 예의를 배우고 어른들도 생기도 얻고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으실지, 하긴 이것도 나만의 공상인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