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에 무예는 기본적으로 전투에 활용되었기에 무기를 다루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중 칼을 사용하는 도검술은 다른 어느 병장기보다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긴 창이나 월도와 같이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 군사들도 기본적으로 짧은 칼을 사용하는 훈련을 했으며, 심지어 원사무기를 활용한 궁수(弓手)나 조총수(鳥銃手)도 근접거리 전투를 위해 허리에 짧은 칼을 패용하고 전투에 임했을 정도였다.
검술 수련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칼이 움직일 때 만들어내는 기본 각도를 몸이 이해하도록 훈련하는 기본기법 수련, 둘째는 칼의 공방을 가상으로 만들어 연결 지어 수련하는 검법 수련, 셋째는 일대 일 혹은 일대 다수가 직접 다양한 무기를 가지고 서로 몸과 몸을 부딪치며 힘과 충격력을 느끼는 교전법 수련, 마지막으로 정확한 힘과 속도를 가늠하기 위하여 인체가 아닌 대나무나 짚단 등 다양한 소재를 직접 공격하는 베기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네 가지 수련법을 적절하게 안배해야 좋은 검선(劍線)과 실전성을 구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근래에 무예가 신체수련에 그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시범 공연화 되면서 네 가지 수련법 중 오직 베기에 치우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시범 현장에서 빠르게 대나무나 짚단을 연속적으로 베어 넘기거나, 쌍수도를 비롯한 큰 칼 혹은 월도(月刀)라는 자루가 긴 형태의 칼을 사용해 짚단 십여 개를 단번에 자르는 모습들은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로지 베기 시범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수련법들은 팽개쳐 버리고 오로지 짚단과 대나무와 사투를 벌이는 수련자들이 부쩍 많아졌다. 좀 더 잘 베기 위하여 실전에는 거의 사용하지도 못할 면도칼을 넘어서는 삼각도라는 얇고 가벼운 칼을 이용해 짚단을 수도 없이 난도질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형태의 칼은 얇은 대나무조차도 벨 수 없는 특수한 짚단베기 전용의 칼이며, 만약 짚단에 작은 모래알이라도 있으면 단번에 칼날이 손상될 정도로 유약한 칼이다.
기본기를 활용한 보법이나 신체 운용법은 저 뒤에 두고 오로지 물체를 정교하게 베는 훈련에만 집착하다 보니 말 그대로 보여주기식 화려한 베기 시범으로 흘러 버리는 것이다. 베기를 시범하거나 훈련할 때에도 베는 것 자체에 중심을 둘 것이 아니라, 베기 전의 보법의 움직임과 베는 순간의 호흡법을 비롯하여 베고 난 이후 자연스러운 칼 거둠법 혹은 다른 목표로의 이동을 위한 칼 겨눔법 등 다양한 요소를 이해해야만 보다 안정적인 베기 훈련 혹은 베기 시범이 되는 것이다.
베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그 물체를 베는 일련의 과정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그것이 내 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풀어내야만 제대로 된 수련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베기에는 기본기가 그대로 투영되어야 한다. 또한 단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보법과 함께 칼의 다양한 움직임이 나와야 한다.
우리가 흔히 듣는 사자성어 중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유교 경전 중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에 등장하는 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글의 핵심이 담긴 말이다. 그 내용을 보면 ‘근본을 알려면 사물을 구명하라’는 것으로 단순히 그 상황이나 행위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그 이치에 대해서 고민하라는 이야기다. 이를 무예 중 검법 수련의 베기에 적용한다면 베기 자체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베어지고 그리고 어떠한 흐름으로 전개가 되는지를 베기에 담아야 보다 근원적인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기본기의 칼 움직임이 다르고, 교전할 때 나타나는 칼의 움직임이 다르고, 검법할 때 기본기가 투영되지 못한 칼은 역시 베기에서도 베기만을 위한 움직임으로 고착할 될 뿐이다. 무예든 세상살이든 베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는 것이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